[시론]최재천/나무들의 저주

  • 입력 2002년 9월 8일 18시 02분


내 고향 강릉이 온통 시뻘건 강펄로 변했다. 비교적 어려서 떠났지만 나이 오십이 다 돼 가는 요즘도 종종 꿈에 보이는 그 아름다운 곳이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늘 그랬지만 이 기막힌 상황에서도 바보처럼 순박한 고향 사람들은 그저 “하늘의 조화를 어쩌겠는가” 하며 체념하고 있다.

지난 몇 년간 나라 안은 물론 세계 곳곳에 기상 재앙이 부쩍 빈번해진 느낌을 누구나 가질 것이다. 혹시 정보화시대이다 보니 그런 소식이 전보다 쉽게 전달되어 그렇게 느끼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나는 이번에 외국 동료들로부터 태풍과 관련해 안부를 묻는 e메일을 수십 통이나 받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이 동방의 작은 나라에서 일어난 재해에 위로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최악의 수해는 환경훼손 탓▼

기후의 변화를 단정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세계 어느 나라든 대개 ‘기상청’에 가장 큰 슈퍼컴퓨터가 있는 법이지만 그래도 당장 내일의 날씨를 예측하는 일조차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러나 몇 년 전 미국해양기상국(NOAA)이 그 동안 축적한 자료들을 분석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하늘의 조화’에 뭔가 심각한 변화가 생긴 게 틀림없다. 전형적인 온대지방인 강릉에 하루 동안 단위면적당 거의 1m에 가까운 비가 쏟아지는 일은 결코 예사롭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이 ‘하늘의 조화’의 변화가 하늘이 우리에게 내린 저주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자초한 벌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어떤 곳에는 전례없이 엄청난 양의 물이 쏟아지는가 하면 다른 많은 곳들은 사막으로 변하고 있다. 지구 생태계의 물 순환이 균형을 잃은 가장 근본적인 원인 중의 하나는 대기권에 수증기를 뿜어 올리는 나무들을 베어낸 데 있다. 매년 거의 우리나라 국토만큼의 산림이 사라지고 있다. 구태여 운명을 들먹이자면 우리 손에 쓰러지는 그 수많은 나무들의 저주이리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세계정상회의(WSSD)가 기대에 못 미친 성과를 올린 채 며칠 전 막을 내렸다. 세계 제일의 부자 나라이자 최대의 오염물질 생산국인 미국의 불성실한 태도가 큰 역할을 했다. 리우회의(1992년) 10년 뒤에 열린 이번 ‘리우+10 회의’를 오히려 20년이나 후퇴한 ‘리우-20 회의’로 전락시킨 조지 W 부시 미국대통령의 실정은 다른 나라에서는 물론 미국 내에서도 준엄한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미국이 이 같은 ‘가진 자의 추태’를 멈추지 않는 한 그로 인한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나는 오래 전부터 환경보전이 외교안보의 문제이자 경제발전의 핵심임을 강조해왔다. 이번 정상회의에서 재생에너지 확대 합의가 보류되는 바람에 우리 정부는 일단 한숨 돌리게 되었다지만 2013년부터 시행되는 제2차 온실가스 감축을 피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재생에너지 사용 비율이 1.6%밖에 되지 않는 상황에서 지금부터라도 능동적으로 환경친화적인 산업구조를 구축해나가지 않으면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가공할 경제도탄에 빠질 것이다.

조만간 세계 초강대국으로 우뚝 설 중국의 산업화가 우리 환경에 미칠 영향은 실로 엄청날 것이다. 이미 황사를 비롯해 중국이 내뿜는 온갖 오염물질들이 우리나라를 무차별적으로 덮치고 있다. 우리 물건을 가장 많이 팔아야 할 곳이 바로 중국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배설물을 우리가 그대로 뒤집어써야 하는가. 환경문제는 21세기 외교안보의 최대 이슈다. 강을 공유하는 나라간에는 물전쟁이 일어날 것이고, 국경을 넘나드는 공해물질은 가장 골치 아픈 협상거리가 될 것이다. 어서 빨리 중국과 확고한 환경외교협정을 맺어야 한다.

▼한-중 환경협정 서둘러야▼

대선 후보들은 언제나 경제문제만 가지고 목청을 돋운다. 하지만 대통령이 경제를 잘 챙기겠다는 말은 마치 가장이 돈을 잘 벌어오겠다는 말처럼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더구나 이제는 제 아무리 경제를 잘 챙긴다 해도 환경을 제대로 다스리지 않으면 절대로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룰 수 없다. 번번이 수마로 조 단위의 재산 피해를 본다면 아무리 뼈빠지게 일한들 무슨 발전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우리 국민의 의식구조에 관한 각종 여론조사의 결과를 보라. 국민은 환경과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당장 껌 한 개 더 파는 것보다 삶의 질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더 이상 경제밖에 모르는 대통령을 원하지 않는다. 경제발전과 더불어 삶의 질을 향상시키겠다는 확고한 의지와 뚜렷한 환경 대책을 제시하는 대통령을 원한다.

최재천 서울대 교수·생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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