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의 눈]신우철/˝개헌하겠다고?˝

  • 입력 2002년 9월 8일 17시 49분


‘신당’을 둘러싼 논의가 유령처럼 정가를 맴돌고 있다. ‘정당’이 대통령후보의 선거용 ‘레테르’로 전락한 것이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요,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관찰되는 일도 아니라고 한다면 이를 꼭 비판적인 시선으로만 볼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근 일련의 정계개편 움직임이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헌법 개정’을 구실로 걸고 있는 이상, 헌법학자의 ‘레테르’를 붙인 사람으로서 한마디 거들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우리의 현행 헌법을 프랑스식 이원정부제로 ‘해석·운용’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헌법 규범의 구조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를 ‘헌법개정’을 통해 실현하려는 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헌법관습과 헌정문화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분권형 대통령제 현실과 멀어▼

첫째, 우리 헌법과 프랑스 헌법은 규범구조가 서로 동일하지 않다. 프랑스 헌법은 ‘행정부 수반’의 지위를 총리에게 부여한 반면, 우리 헌법은 이를 대통령에게 부여하고 있다. 프랑스 헌법은 거부권 등 대통령의 ‘저지적 권한(pouvoir d’emp^echer)’을 산발적으로 규정했을 뿐이지만, 우리 헌법에서 규정한 대통령의 권한들은 그것보다 포괄적이고 강력하다. 흔히 ‘절반 대통령제’로 지칭되는 프랑스의 정부 형태와 견준다면, 우리의 제도는 적어도 ‘4분의3 대통령제’ 정도로는 명명되어야 한다.

둘째, 의회 다수당의 당수가 총리로 임명되어 반대당의 대통령과 함께 ‘두 입으로 한목소리를 내는’ 이원정부제는 ‘절제와 지성’이라는 프랑스 특유의 관용적 헌정문화 아래에서만 유효하게 운용될 수 있는 제도다. 이른바 좌우익 ‘동거정부(Cohabitation)’의 운영이 가능한 것은 ‘드골주의’의 오랜 헌법적 관습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도,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인 총리가 앞으로 자신이 대통령이 될 경우를 대비해 현 대통령과의 관계에서 ‘자제하는 다수’의 태도를 갖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지명한 총리가 국회의 동의조차 받지 못하고 여야가 정면 충돌하고 있는 우리 현실에서 야당 수뇌가 총리로 입각해 반대당 대통령과 협력하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바로 5년 후도 내다보지 못하고 당장 사생결단을 내야겠다고 싸우고, 탈당하고, 분열하는 정치인들이다.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헌법 개정’이라니, 자전거도 못 타는 어린이가 왜 자동차를 사주지 않느냐고 떼를 쓰는 것이나 진배없다.

‘분권형 대통령제’의 옹호자들은 명심하기 바란다. ‘분권’이란 개념은 ‘대립’과 ‘분열’을 반드시 내포한다는 것을. 미국 헌법의 ‘아버지들’이 부통령 지위를 ‘인간이 만들어낸 직책 중 가장 별 볼일 없는 자리’로 격하시켰던 것도 행정부 내에서 분열·대립이나 책임 전가의 상황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해 강력하고 단일한 행정부를 구성하려는 목적에서였다. 대통령제의 내재적 논리에 반하는 이질적 요소를 접합하려는 시도는 독일의 헌법학자 칼 뢰벤슈타인이 경고하듯 ‘죽음의 키스’를 맛보게 될지도 모른다.

정치인들이 ‘경선불복·경선무효’에 그친다면 “정당정치란 그런 것이거니”하고 눈감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헌법불복·헌법무효’로 나아간다면 우리는 이에 저항할 수밖에 없다. 국민보다 앞서, 더 세차게 저항해야 하는 것이 헌법학자의 도리가 아닌가. 민(民)은 곧 맹(盲)이니 노동력을 착취하려고 종의 ‘눈’을 찌르는 모습을 본뜬 글자요, 헌(憲)은 곧 선(先)이니 전투를 독려하려고 앞서 살피는 장군의 ‘눈’을 본뜬 글자다. ‘국민’의 눈을 가리는 잡티를 걷어내어 먼저 보고, 먼저 고하는 것이 ‘헌법의 눈’ 아니겠는가.

▼헌법에 손댈땐 저항 부를 것▼

지금이면 ‘나락’으로 넘실대도 시원찮을 김해평야가 수마가 남긴 ‘오물’과 농민들의 ‘눈물’로 넘쳐나고 있다. 여름내 쏟아진 비로 한 철 장사를 놓친 동해안에서는 다시 쏟아진 폭우에 시민들이 넋을 잃고 있다. ‘신당’과 ‘개헌’에 골몰하는 정치인들이여, 헌법 제34조 6항을 읽어보기 바란다. 틀림없이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라고 씌어있을 것이다. 절망한 이재민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일으켜 세워주는 일이야말로 정치하는 사람들의 숭고한 ‘헌법적 의무’가 아니겠는가.

당신들이야말로 이들에게 구원의 머리를 내미는 거북이요, 희망의 꽃을 꺾어바치는 노인이 되어주어야 한다. 제발이지 무의미한 ‘정쟁’은 이제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 헌법의 소리,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라. 틀림없이 ‘진실’이 들릴 것이다.

신우철 영남대 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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