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에피소드 곁들인 음식백과사전 ´먹거리의 역사´

  • 입력 2002년 9월 6일 17시 33분


’먹거리의 역사’는 인간역사를 보는 또 다른 렌즈다. 그림은 르느와르의 ‘선상의 점심’(1881).동아일보 자료사진
’먹거리의 역사’는 인간역사를 보는 또 다른 렌즈다. 그림은 르느와르의 ‘선상의 점심’(1881).동아일보 자료사진
◇먹거리의 역사(총2권)/마귈론 투생 사마 지음 이덕환옮김/각 472쪽, 525쪽 각 17000원 까치

마귈론 투생 사마의 ‘먹거리의 역사’는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음식과 관련된 거의 모든 사항을 담고 있는 책이다. 재료 이야기로부터 요리의 발달, 음식과 관련된 사회적 관습, 영양소의 분석 등 그야말로 먹거리에 대해서는 가히 결정판이라고 불러도 족하다.

구석기 시대의 꿀 채취와 사냥, 신석기 시대 곡물 경작의 시작, 기름과 포도주의 역사, 생선과 가금류의 종류, 푸아 그라같은 최고급 요리의 발달, 설탕·초콜릿·커피의 전파, 감자의 도입, 채소의 진화, 그리고 최근의 음식 저장법과 다이어트 등 빠진 것이 없다.

그런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전세계에 걸쳐 역사적 사실, 신화, 관습, 농학, 경제학, 섭생법 등을 샅샅이 조사한 저자의 노력이 놀라울 정도다.

그런 점에서 보면 약간 무뚝뚝한 우리말 번역본의 제목보다 원래의 불어본 제목인 ‘음식의 자연사 및 풍속사’가 더 합당해 보인다.

약간 모호한 표현이 될 지 모르겠지만 이 책은 프랑스적인 ‘에스프리’가 넘치는 책이다.위트 넘치는 문장 속에 놀라울 정도의 박식함이 실려서 전반적으로 지적이면서도 경쾌하기 이를 데 없다. 그와 같은 재치있는 문장력이 뒷받침되어 있기에 10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이 책을 읽는 것이 고통스러운 작업이 아니라 즐거운 체험이 된다.

한 가지 예로 커피에 대한 설명을 보자. 아라비아 남예멘의 한 이슬람교 수도원에서는 가끔 염소들이 밤새도록 눈이 말똥말똥한 채 잠을 자지 않는 일이 일어나곤 했다. 염소들이 어느 관목의 열매를 먹은 날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한 성직자는 도서관에서 식물학 서적을 뒤진 결과 이 나무들이 예전에 아비시니아 출신 노예들과 함께 이 지역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러 실험을 거듭한 끝에 그는 그 열매를 볶고 가루를 내어 달이면 아주 향기 좋은 액체를 얻을 수 있고, 게다가 그 액체를 마시면 정신이 아주 맑아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밤샘 기도를 해도 다른 수도자들은 피곤에 지쳐서 기도문을 중얼거릴 뿐이었지만 그 액체를 마신 이 성직자만이 완전히 깨어 있었다. 그가 이 액체, 즉 커피를 나누어주자 다른 수도자들에게도 똑같은 기적이 일어났다. 이슬람권으로부터 유럽으로 들어온 커피는 곧 큰 성공을 거두어서 정치와 문학의 토론 장소로서 카페가 사방에 생겨났다. 긴장한 경찰들이 한때 카페를 집중 단속하기도 했으나 대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커피가 독약이라는 비난이 줄지 않자, 두 명의 사형수를 이용해서 차와 커피의 독성 실험을 했다.

각각 차와 커피를 하루 세 잔씩 마시는 조건으로 사형을 면제받는 방식이었는데, 실험 결과 차를 마신 죄수는 79세, 커피를 마신 죄수는 80세까지 살았다.

커피의 성공은 곧 브라질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노예제 대규모 농장이 만들어지는 결과를 낳았고 이 지역 경제의 성쇠가 서구의 수요에 좌우되게 되었다. 19∼20세기에는 때로 과도한 수요로 가격이 폭등하고 때로 공급 과잉으로 가격이 폭락하는 현상이 빈발했고, 자연히 커피 재배 지역의 경제가 세계적인 투기 열풍의 피해를 입곤 했다.

이런 식이다. 역사라는 씨줄에다가 정치·경제·문화·심성 등의 많은 요소들이 날줄로 짜여 있어서 전체적으로 화려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시간이 허락되는대로 찬찬히 에피소드들을 음미해가며 읽으면 정말로 유쾌한 성찬(盛饌)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이 책의 문제점을 들라면 역사책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책의 성격이 비역사적이라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많은 정보들이 들어있지만 그것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아이디어는 미약한 편이다. 채식 위주로부터 육식 위주 식단으로 인류의 먹거리가 변해간다는 큰 흐름 정도를 지적할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의 뚜렷한 주장을 펼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암만해도 유럽, 특히 프랑스가 가장 잘 서술되어 있고 그에 비해 타 문명권은 상대적으로 소략하게 설명되어 있다는 것도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결국 이 책은 엄격한 학문적 성격의 연구서보다는 일반인을 위한 고급 교양 서적에 가깝다. 누구든 대단히 흥미롭게 이 책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나면 정말로 풍부한 교양과 위트를 얻어서, 적어도 어디 가서 대화의 소재가 떨어지는 법은 없을 것이다. 원제 Histoire naturelle & morale de la nourriture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joukc@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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