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영명/측근 '입'에 의존 말라

  • 입력 2002년 8월 29일 18시 53분


장상씨에 이어 장대환씨가 국회에서 국무총리 임명동의를 받지 못했다. ‘황혼’에 접어든 정부로서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치욕적인 일을 당한 셈이 되었다. 장상씨나 장대환씨 모두 본인의 치부가 낱낱이 밝혀지고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으니 인간적으로 안됐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장상 총리서리가 임명되었을 때 많은 사람이 최초의 여성총리라는 점을 높이 샀으나 그는 아들 국적 문제 등 도덕성의 흠결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장상씨가 한국의 평균적인 기득권층 또는 상류층의 행태를 벗어나지 않았고 국회나 언론의 상층부도 비슷한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어 그의 총리 임명동의는 무난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 예상이 필자를 괴롭혔으나 다행히 그 예상은 빗나갔다.

▼´정실´로 총리지명하다니▼

장대환씨의 경우 여러 가지 문제가 도덕적인 흠결 수준을 넘어서는 범법의 수준이었고 이에 따라 총리 임명동의는 한국 정치의 수준을 한 단계 떨어뜨릴 위험한 일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국회의 판단은 국민의 일반적인 상식을 벗어나지 않아 그런 위험을 피해갔다. 한국 정치에 아직 희망이 있음을 알게 되어 기쁘다.

물론 두 총리서리의 임명동의 부결은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힘 겨루기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 결과가 두 당의 진흙탕 싸움을 가중시킬 우려도 있다. 두 당은 이 일을 더러운 정쟁으로 이용하기를 중단하고 무엇이 진정 국민을 위하는 정치인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정부의 행태다. 장상씨나 장대환씨 모두 대통령 주변인물들과 가까운 사람으로서 서리 임명 자체가 정실에 좌우된 점이 명백하다. 장상씨의 경우 국내 유수 대학의 총장이자 여성 지도자로서의 자격이 높이 평가됐겠으나 그에 대한 심도있는 사전 검증이 부족했다. 장대환씨를 총리로 삼겠다는 의욕은 처음부터 무리한 것이었다. 도덕성, 불법행위 등을 따지기 전에 별다른 경력이 없고 장인에게서 물려받은 기업체를 소유하고 경영한 경험밖에 없는 그를 최고 관료직인 국무총리에 임명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놀라울 따름이다. 만약 그가 국회에서 총리로 동의 받았다면, 이는 생업에 애쓰는 일반 서민을 우롱하는 일이요,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는 수많은 공무원을 맥빠지게 만드는 일이었을 것이다.

정부는 총리 임명동의를 거부한 국회를 원망할 것이 아니라 왜 그런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를 성찰해야 한다. 한 마디로 국민의 정서나 윤리적 기준에 너무 맞지 않은 인물들을 국민의 존경을 받아야 할 국무총리의 자리에 임명한 것이 잘못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황혼을 맞이해 일종의 마비증상에 빠진 것 같다. 판단의 마비와 행동의 마비, 즉 이중의 마비다. 이런 일은 정권 지지자에게나 비판자 모두에게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판단력을 회복해 ‘정치의 정도(正道)’를 가야 한다. 몇 달 남지 않은 황혼 정부의 총리직을 선뜻 맡겠다는 사람을 찾기 힘든 고충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정도를 가야 한다. 그것은 총리직이 단순히 ‘글로벌 최고경영자(CEO)’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도덕성을 바탕으로 각 부서와 정파 사이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직책이라는 점을 자각하는 일이다.

이런 자각은 어떻게 보면 국정 운영에 대한 근본 철학을 바꾸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정부에 이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한 일일 수도 있겠으나 정파에 관계없이 국민적인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인물을 총리로 지명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대통령이 지금이라도 일부 측근의 조언에만 의존하지 말고 각계 각층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 총리 임명동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정치권의 힘 겨루기는 어느 면에서는 낭비이고 국가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국가 위신을 떨어뜨리는 일은 자격 없는 부도덕한 인물이 총리가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 국회는 이번에 한국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국민의 흔쾌한 성취를 통해서가 아니라 개인과 정부의 치욕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각계 각층 의견 수렴을▼

다음 총리에 누가 지명될지 모르겠지만 대통령은 두 번의 교훈을 뼈저리게 깨닫기 바란다. 그것이 그를 위한 길이고 국민을 위한 길이고 또 차기 지명자를 위한 길이다. 아울러 위헌 시비가 계속 되고 있는 총리서리 제도에 대해서도 재고하기 바란다. 다음 총리는 총리 서리가 아닌 ‘지명자’로서 떳떳하게 국회의 임명동의를 얻기 바란다.

김영명 한림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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