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최화경/義人에 대한 도리

  • 입력 2002년 8월 29일 18시 33분


꼭 30년 전 광주에서 일어난 일이다. 한 50대 남자가 철길로 뛰어들었다. 열차가 오는 것을 모르고 노는 어린이 2명을 발견하고서였다. 그는 어린이들을 철길 밖으로 밀어냈으나 자신은 열차를 피하지 못하고 숨졌다. 그로부터 29년이 흐른 지난해 유가족의 진정을 들은 공무원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리고 수소문 끝에 당시 목격자와 사고를 낸 기관사를 찾아냈다. 하마터면 그대로 묻힐 뻔한 의로운 죽음이 빛을 본 것이다. 적은 액수였지만 보상금을 받아든 유가족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명예를 찾아주어서 더 고맙다.”

▷의로운 죽음은 늘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3년 전 씨랜드 화재 참사 때 불길에 뛰어들어 어린 제자들을 구하고 숨진 김영재 교사, 지난해 일본 도쿄 지하철역에서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려다 사망한 이수현씨…. 소매치기 현장을 보고도 못본 채 지나갈 만큼 각박한 세상이 아닌가. 남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희생이다. 그런 의로운 죽음이 존경받고 제대로 대우받는 사회일수록 건강하고 정의롭다. 지난해 의사당 총기난사사건으로 숨진 두 경호원을 국가가 앞장서서 보상하고 의사당 묘역에 안장한 미국의 예에서 보듯이 선진국들은 공동체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철저하게 예우한다.

▷보험회사들이 소매치기범을 잡으려다 차에 치여 숨진 고려대생 장세환씨의 보상금을 깎았다는 얘기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내세운 이유가 길을 무단 횡단했기 때문이라니 더욱 그렇다. 평상시 같으면 또 모른다. 범인을 쫓는 긴급한 마당에 교통신호 살피고 횡단보도를 찾아 건너라면 이건 차라리 범인을 놔주라는 얘기와 다를 바 없다. 사회가 이렇게 냉혹하니 ‘괜히 의협심 내세웠다가는 나만 손해’라며 너도나도 몸을 사릴 수밖에….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각박한 계산법이다.

▷어떤 규정이든 그 근간은 건전한 상식이다. 정의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은 마당에 교통규칙 위반 운운하며 책임을 떠넘긴다면 손가락질 받기 딱 알맞다. 졸지에 자식을 잃고 넋 놓은 부모 마음을 한 번이라도 생각했다면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중국음식점 배달원의 교통사고를 몇 푼 안 되는 합의금으로 끝내려 했다가 그 배달원이 ‘나홀로 소송’을 내 이기는 바람에 보험회사가 망신당한 게 불과 며칠 전 일이다. 돈에 죽고 돈에 산다는 보험회사지만 의인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는 지켰으면 한다.

최화경 논설위원 bb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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