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스테디셀러]텅빈가슴 채워주는 '첫사랑의 설렘'

  • 입력 2002년 8월 16일 18시 00분


□삼남에 내리는 눈 / 황동규 지음 / 166쪽 5000원 민음사

“내 그대를 생각함은 언제나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거나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누구나 이런 사랑을 꿈꾼다. 하지만 물질만능주의와 인스턴트 사랑이 판치는 이 시대에 순수한 사랑이 과연 존재할까. 황동규(黃東奎·서울대 영문과 교수) 시인은 ‘즐거운 편지’에서 “그렇다”고 말한다.

‘즐거운 편지’가 수록된 그의 시집 ‘삼남에 내리는 눈’은 1975년 초판이 나왔다.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지만 당시 시집은 인기가 별로 없었다. 시인이 자비로 출판해 초판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았고 세로쓰기 편집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삼남…’은 특이하게도 가로 쓰기 편집으로 나왔다. 또 사랑에 대한 신실한 언어가 독자들의 호응을 얻으면서 지금까지 20만부의 판매고를 기록하고 있다.

특히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편지’(1997) 등의 영화에서 ‘즐거운 편지’가 낭송되면서 97년말부터 수개월동안 10만부 넘게 팔리기도 했다. ‘즐거운 편지’에서 모티프를 얻은 허진호 감독은 97년 ‘8월의 크리스마스’ 제작 당시 황동규 시인을 직접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는 후문이다.

시인은 “내 당신은 미워한다 하여도 그것은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기도)라고 고백하고, “내 언제나 버려두는 자를 사랑하지 않았는가”(어떤 개인 날)라고 독백한다. “꿈에 보이는 군중들은 말이 없다. 꿈과 생시는 의자 위치만 바꾸어도 총성이 들릴 것 같은 그런 거리”(남해안에서)라거나 “조국은 닫혀있다”(虎口)며 군사정권 시절의 삭막함을 그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연인 친구 그리고 ‘소외된 자’와 ‘상실의 시대’를 사랑으로 감싼다.

민음사 측은 “첫사랑의 설렘 같은 관조적인 사랑의 방식이 많은 이에게 호응을 얻은 요인”이라며 “황동규 시인의 시는 쉽게 읽히면서도 가슴 뭉클한 여운을 남기는 매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즐거운 편지’가 대중적인 호응을 얻으면서 ‘삼남…’이 황동규 시인의 대표시집처럼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이후에 발표된 ‘풍장’(1995)이나 ‘미시령 큰 바람’(1998) 등 시집들도 뛰어난 작품성을 평가받고 있다.

황태훈기자 beetle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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