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종이에 기록되기전부터 중국선 철학이 '중국…'

  • 입력 2002년 6월 21일 17시 42분


대부분의 중국철학사를 동물의 몸에 빗대어본다면 춘추전국시대는 호랑이의 얼굴, 송명시대는 곰의 허리, 근현대는 뱀의 꼬리와 같았다고 할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의 철학은 다채롭고, 송명이학(理學)은 풍부하고, 근현대철학은 빈약하다는 말이다.

다양한 제자백가의 사상 중에서도 유가와 도가 철학은 호랑이의 얼굴 속의 두 눈이다. 중국철학하면 공자와 노자가 떠오를 정도다. 민감한 현실 문제를 건드리는 근현대철학과 달리 이들 철학에 대해서는 지나치다고 할 정도로 많은 연구가 이뤄져 왔다. 그러나 막상 공자 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인(仁)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지, ‘도덕경’의 작자로 알려진 노자는 누구인지 등등 아주 간단한 문제들조차 분명하지 않은 점이 많았다.

그런데 1993년 곽점(郭店)에 있는 초나라 무덤에서 나온 유가와 도가 관련 문헌들은 이런 고대철학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이것은 중국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커다란 복이다. 이제 우리는 퇴계 이황이나 다산 정약용은 물론이고 주희도 볼 수 없었던 중국 고대의 문헌을 마주 대하게 된 행복한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한편 이들 문헌은 종이가 아니라 죽간(竹簡)에 기록돼 있는데 이를 계기로 우리는 사상과 그 사상을 담는 도구로서의 물질과의 관계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중국고전을 한문으로 직접 읽어본 사람은 누구나 그것이 매우 간결한 문체로 쓰여져 있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이는 글을 쓰는 재료가 귀하고 또 함부로 지울 수 없었던 점과 관련이 있다. 이 점은 근자에 컴퓨터로 글을 쓰면서 문체가 달라지는 것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옛날에는 사상이 물질(죽간)을 만나기 위해서는 주로 사상이 물질을 기다렸다면 디지털 시대에는 물질(하드웨어)이 사상을 기다리는 형국이라고나 할까.

이 책은 저자가 이러한 물질과 사상의 관계에 착안하여 이른바 간독시대(簡牘時代)의 중국사상을 다룬 아주 흥미로운 책이다. 간독은 종이 발명 이전에 글쓰기 재료로 쓰였던 대나무(簡)와 나무(牘)를 말하는데 은나라로부터 진한시대를 거쳐 종이가 발명되기까지 천 600∼700년에 걸친 오랜 기간 동안 문자기록의 도구로서 사용됐다.

간독시대란 저자가 이것이 가장 많이 쓰인 B.C 5세기부터 2세기까지를 특징짓는 문화사적 개념으로 최초로 사용한 것이다. 간독시대에 백서(帛書)를 포함시킨 것이나 물질과 사상의 관계에 대한 해명이 부족한 것은 흠이지만 출토 문헌에 대한 최근의 중국학계의 여러 성과를 아주 요령 있게 소화해서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얇지만 두툼한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발굴을 둘러싼 일화나 시대적 분위기를 함께 소개하고 있어 재미있고 유익하다. 참고로 말하면 곽점 문헌에서 ‘인(仁)’은 몸 ‘신(身)’ 자 밑에 마음 ‘심(心)’이 있는 자형(字形)으로 몸으로 절실히 느끼는 마음을 뜻한다.

황 희 경 성심외국어대 교수·중국철학

dishan@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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