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2002 대선후보 검증 5]정치인으로

  • 입력 2002년 5월 17일 18시 02분


《동아일보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대통령후보에 대한 검증 기획보도 시리즈 1부인 ‘공인 이회창과 노무현’을 5회로 마친다. 2부는 향후 지방선거를 비롯한 정치일정을 감안, 적절한 시기에 게재할 예정이다. 동아일보는 유력 대선후보의 자질과 능력, 공약과 정책에 대한 검증작업을 12월19일 대선 때까지 계속할 방침이다.》

▼이회창 후보▼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대통령후보의 성가(聲價)는 총리를 그만둔 이후 더 높아졌다. 95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여야는 총리직에서 물러나 야인(野人) 변호사로 있던 그를 서울시장 후보로 영입하기 위해 부심했고, 그해 12월 이 후보의 회갑 논문 증정식에는 각 당 관계자들이 앞다투어 참석할 정도였다.

96년 1월 이 후보가 당시 신한국당 중앙선대위의장으로 화려하게 정계입문한 배경도 그런 국민적 이미지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대쪽 이미지는 종종 패권적 승부사 기질이나 정치적 협량(狹量)으로 투영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제1부 공인 이회창과 노무현▼

- ④총리와 장관
- ③대쪽과 인권
- ② 변호사 시절
- ①무명 시절

이 후보가 96년 총선을 진두지휘해 당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선거 이후 YS는 ‘이한동(李漢東) 대표 카드’를 생각했다. 이에 이 후보는 탈당 카드로 맞섰고, 이듬해 3월 당 대표를 거머쥔다. YS의 오랜 친구인 김윤도 변호사는 그 때 일을 두고 “이회창이 YS를 협박했다”고 말했다.

98년 초 서울 여의도의 한 음식점에서 이 후보가 당직자들과 폭탄주를 돌리며 97년 대선 패배 이후의 인간적 고뇌를 전에 없이 진솔하게 토로하자 김문수(金文洙) 의원은 “총재님, 왜 진작 그렇게 안하셨습니까. 진작 이랬다면 실패는 없었을 것입니다”며 울먹인 것도 이 후보의 정치적 포용력 부족에 대한 회한 때문이었다.

이 후보가 97년 7·21전당대회에서 신한국당 대선후보로 뽑힌 뒤 경쟁자였던 이인제(李仁濟) 박찬종(朴燦鍾) 이수성(李壽成)씨의 탈당을 막지 못하고, 같은 해 10월 DJ 비자금 수사유보를 계기로 YS와 등지게 된 것도 정치적 흥정을 거부하는 그의 사고방식이 크게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98년 8월 한나라당 전당대회를 통해 총재직에 복귀한 이 후보는 더 단호해진다. 그는 2000년 4·13총선을 앞두고 97년 대선 당시 자신을 적극 도왔던 김윤환(金潤煥) 신상우(辛相佑) 이기택(李基澤) 등 거물급 중진들을 대거 공천탈락시키는 ‘2·18물갈이’를 단행한다. 이들은 이 후보의 물갈이를 ‘인간적 배신행위’로 받아들였고, 당 안팎에서는 ‘학살’이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선에서 이겨 이 후보는 ‘헌정사상 유례 없이 강력한 야당총재’라는 평가를 받으며 대권 재수의 기반을 다져나갔지만 그만큼 주변의 적도 많아졌다. 이 후보가 피해의식을 드러낼 때도 있었다.

한나라당의 한 고위관계자는 “3월 어느 날 집단지도체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이 후보와 H호텔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수행원이 호텔방에 먼저 들어와 창문을 모두 닫고 커튼을 친 뒤 불까지 껐다. 도청을 막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갑갑한 생각이 들어 ‘불은 좀 켜두자’고 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 후보가 통상 비밀스러운 만남이 필요할 때는 S호텔을 애용하는데 객실에 노트북을 켜놓고 300만원짜리 도청방지프로그램을 가동시킨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그 정도일 줄을 몰랐다”고 말하기도 했다.

자연 이 후보의 사람 만나는 스타일에 대해서도 몇 년간 그를 가까이서 접한 의원들조차 “정감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고 말한다. 2000년 11월 이 후보의 제의로 S호텔에서 그와 단독으로 만난 박근혜(朴槿惠) 의원은 회동 후 “도대체 왜 만나자고 했는지 모르겠다”고 꼬집은 적도 있다.

반면 K의원은 이 후보에 대해 다른 기억을 갖고 있다. 이 후보가 당 대표 시절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된 그는 이 후보를 찾아가 민원을 했다가 거절당하고 한동안 섭섭해했으나 나중에 K의원은 이 후보가 ‘간접적으로’ 도움을 준 사실을 알고 무척 고마워했다는 것이다.

이 후보의 정치적 유연성을 보여주는 사례도 없지 않다.

96년 12월 26일 새벽 5시 반. 노동법 강행 처리를 위해 당 지도부의 극비 비상연락을 받고 집결지에 도착한 이만섭(李萬燮) 상임고문(현 국회의장)은 버스에 오르다 깜짝 놀란다. 이회창 의원이 제일 먼저 버스에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장 비서실의 한 관계자는 “이만섭 의장은 그 때 ‘대쪽으로 알려진 이회창씨가 날치기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동원령에 맞춰 그렇게 일찍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며 놀라워했다”고 기억했다.

대북 문제에서는 비교적 엄격한 상호주의 원칙을 견지해오던 이 후보가 지난해 9월20일엔 인도적 차원에서 쌀 200만섬 대북지원을 제의해 논란을 불러일으킨 적도 있다.

이 후보의 박진(朴振) 특보는 “이 후보가 생각하는 원칙과 포용력은 다르다”고 말했다. 진정한 포용력은 타협이나 흥정이 아니라 자신이 믿는 원칙과 소신에 따르는 것이라는 게 이 후보의 생각이라는 얘기였다.

박성원기자 swpark@donga.com

▼노무현 후보▼

90년 3당 합당에 반대해 YS와 헤어진 이후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대통령후보는 부산의 ‘철벽’과도 같은 지역감정을 정면 돌파하기 위해 도전을 거듭한다. 92년 14대 총선, 95년 부산시장 선거에 이어 2000년 16대 총선 때 몸을 던졌으나 모두 실패한다. 하지만 그가 무턱대고 ‘사지(死地)’에 뛰어든 것만은 아니었다.

93년 4·23재·보선 때 그는 민주당 이기택(李基澤) 대표에게서 부산 사하 출마를 종용받는다. 그러나 당시는 YS의 지지율이 90%가 넘는 때. 그해 초 전당대회에서 47세의 나이로 당 최고위원에 선출된 노 후보는 부산 사하 대신 경기 광명을 요구했다.

이 대표는 결국 최고위원 선거에서 낙선한 김정길(金正吉) 전 의원을 부산 사하에 내보냈고, 김 전 의원은 당시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이 공천한 민자당 박종웅(朴鍾雄) 후보에게 참패한다. 김 전 의원은 당시의 일에 대해 “당연히 최고위원에 당선된 사람이 나갔어야 했는데 나가면 떨어질 것이 뻔했으니까…”라고 말을 접었다.

부산 사하 보선 출마를 피한 것은 노 후보의 현실주의적 면모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또 2000년 총선에서 노 후보가 출마한 지역은 연고가 없던 부산 강서였다. 그는 훗날 “서면 같은 중심지에서 출마하고 싶었는데, ‘옷로비’ 사건이 터져서 좀더 안전한 곳을 골라 봤다”고 털어놨다.

이미 88년 정치입문 과정에서부터 그는 이 같은 면모를 보여줬다. 김영삼 정부 시절 청와대 행정관을 지낸 김용철(金容哲)씨는 ‘노무현론’이라는 책에 다음과 같이 썼다.

“노무현은 ‘나는 일찍부터 혁신정당의 필요성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한겨레당 참여를 권유받은 적도 있지만 거절했다. 그를 망설이게 한 것은 당선 가능성의 문제였다.”

결국 그는 YS의 통일민주당을 선택했고, 부산 동구에서 당선됐다. 물론 그렇다고 그의 ‘진보적 개혁주의자’의 모습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88년 7월 그의 첫 대정부질문에는 인권변호사 시절의 열정이 가득 배어 있다.

“며칠 전에는 열네살난 어린 소년이 하루 11시간의 장시간 노동에 견디다 못해 자기가 다니던 공장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 철부지를 잡아다 방화죄로 처벌을 하고 나면 그만입니까. 의원 여러분, 가만히 앉아 계셔도 11시간이면 다리가 꼬이고 허리가 아프지요?”

그는 대정부질문에서 “재벌 총수와 그 일족이 독점하고 있는 주식을 정부가 매수해서 노동자에게 분배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대선후보 경선과정에서 그는 이 대목을 문제삼은 이인제(李仁濟) 후보의 공격에 대해 ‘장(場)의 논리’ 또는 ‘역설의 야유’라며 비켜갔지만, 대정부질문에서 그는 “공연히 한 번 해보는 소리가 아닙니다”고 분명히 말했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이런 인식은 88년 총선 당시 공약집에도 나타나 있다.

‘오 민주여 사람사는 세상이여’라는 제목이 붙은 공약집에는 ‘재벌을 해체하고… 재벌과 부정축재자들이 독점하고 있는 토지는 강제징발하여 무주택서민과 중소기업 육성자금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정치인 노무현의 열정은 현실과 충돌하면서 종종 ‘돌출적인 행동’으로 표출됐다. 88년 5공 청문회 때의 명패 투척사건이나 89년의 의원직 사퇴 해프닝 등이 대표적 사례였다.

그는 양김과의 관계에서도 협력과 비판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그에게 첫 공천을 줬던 YS와는 90년 3당 합당 합류 거부로 등을 돌렸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95년 민주당에서 분가해 국민회의를 창당할 때도 주저 없이 DJ와 결별을 선언했다.

3당 합당 합류 거부는 정치인 노무현에게 총선 낙선의 좌절과 함께 정치지도자로서의 성장 기회를 동시에 제공했다. 92년 총선에서 낙선한 것이 팬클럽인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을 태동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YS를 “훌륭한 정치지도자는 아니지만 ‘훌륭한 보스’ ‘탁월한 두목’이었다”고 평가했고, DJ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공부하고 노력하는 사람, 그래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는 사람”으로 묘사했다.

정치행로에 굴곡이 많았던 만큼 노 후보에 대한 정치권의 평가 역시 극과 극으로 갈린다.

이철용(李喆鎔) 전 의원은 ‘나도 심심한데 대통령이나 돼볼까’라는 저서에서 “자기관리를 철저하게 하는 연극배우 같은 성격”이라고 혹평했다. 반면 과거 노 후보와 민주당을 함께 했던 유인태(柳寅泰) 전 의원은 “한 번 옳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밀고 가는 원칙적 현실주의자”라고 평가했다.

윤영찬기자 yyc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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