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황호택/소리 없는 아파트

  • 입력 2002년 4월 24일 18시 42분


아들 셋을 훌륭하게 키워 성공시킨 노부인의 회고록에서 셋집을 전전하던 젊은 시절의 설움을 적어놓은 대목을 인상 깊게 읽었다. 셋집을 구하러 가면 으레 집주인이 “자녀가 몇이냐”고 묻고 솔직하게 대답하면 “다른 집을 알아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두세 살 터울의 사내아이들이 좁은 방에서 뒹굴다 보면 집안 기물이 부서지기가 예사고 우당탕대는 소리가 그칠 날이 없다. 이 부인은 아들 없는 설움 대신에 아들 많은 설움을 이사갈 때마다 겪었다.

▷딸만 둘이거나 아들 하나 딸 하나면 훨씬 조용하지만 자녀의 조합이 어디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 아파트에서 아들 둘을 키우다 보면 셋집 신세를 면해도 아래층 눈치를 보고 살아야 한다. 이해심이 많은 아래층 이웃을 두면 다행이지만 신경과민형을 만나면 죄지은 사람처럼 사는 스트레스가 보통이 아니다. 사내아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모두가 삼간 누옥에 살던 시절 아들 많은 집에는 구들장 성한 방이 없었다. 시공이 부실한 아파트에서는 아이들 잡도리를 단단히 해도 한계가 있다. 환경부 사이버민원실에는 윗집에서 텔레비전 연속극 ‘여인천하’ ‘명성황후’ ‘제국의 아침’ 중에서 무엇을 시청하는지를 알 정도라는 내용이 떠 있다.

▷환경분쟁조정위원회에서 아파트 층간 소음에 대해 아파트 부실 시공이라는 첫 유권해석을 내림에 따라 건설업체들은 소리 줄이기 시공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하게 됐다. 건축 전문가들에 따르면 층간에 공간이 있는 ‘뜬바닥’ 공법을 사용하면 소음을 대폭 줄일 수 있지만 한국의 아파트는 방바닥이 따뜻하도록 온돌방 시공을 해 소음 전달이 잘 된다는 설명이다. 건설업체들은 소리 없는 아파트를 짓기 위해 건축 자재 및 시공 기술 개발에 투자를 늘리고 있다. 부산의 노비스코리아처럼 층간에 고무패드를 넣어 소음과 진동을 차단하는 공사를 전문으로 하는 업체도 생겼다.

▷미국 도시의 월세용 2, 3층짜리 공동주택은 층간을 판자로 시공한 건물이 많다. 위층에서 식탁 의자를 끄는 소리까지 선명하게 들린다. 미국 도시의 주재원 집에 서울에서 온 손님이 하룻밤을 묵는데 심야에 경찰이 찾아왔다. 한밤중에 전기톱을 사용하는 것 같다는 신고를 아래층에서 해왔다는 것이다. 정말 요란스럽게 코를 고는 손님이었지만 깊은 밤에 길거리로 내보낼 수도 없었다. 공동주택의 위아래 층 이웃들은 서로 조심하고 이해하며 사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황호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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