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월드컵]월드컵에 한번 미쳐보자

  • 입력 2002년 4월 5일 17시 55분


최근 ‘이것은 서태지가 아니다’라는 서태지 팬덤을 다룬 영화가 서울 한켠에서 조용히 상연된 바 있다. 서태지라는 문제적인 아티스트에 유령처럼 따라붙는 팬들의 실체를 추적한 기록 영화다.

팬(fan)과 왕국(kindom)의 합성어인 팬덤이라는 유행어가 시사하듯 영화의 주인공은 서태지가 아니다. 단지 서태지를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로 거대한 ‘집합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열성 팬들이다. 서태지라는 이름과 공연장 주변만 비춰질 뿐 이렇다할 배우가 단 한 사람도 등장하지 않는 두 시간 짜리 영화에서 잠시 졸거나 눈을 떼기란 힘들다. 서태지를 주축으로 불특정 다수가 보여주는 열정의 흐름과 열광의 도가니를 끈질기게 따라잡으면서 팬덤의 정체를 거울처럼 비추어 주기 때문이다.

한국축구의 붉은 악마는 바로 서태지 팬덤과 동일한 정체성을 보여준다. 붉은 악마를 축구에 한정된 ‘특유의 문화적 현상’으로 보는 시각을 월드컵을 계기로 국민적 팬덤 현상으로 확산시킬 수는 없을까. 단지 구경꾼의 자리가 아닌 팬이면서 그 자신 대표선수이고, 팬이면서 그 자신 감독이며, 팬이면서 그 자신 관람자인 월드컵 팬덤. 팬이면서 그 자신 ‘신의 손’을 자랑하는 골키퍼가 되어 보기도 하고, 팬이면서 그 자신 환상적인 경기를 주도하는 플레이메이커가 되어 보기도 하며, 팬이면서 그 자신 ‘세기의 골’을 연출하는 골게터의 희열을 함께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월드컵이 될 것이다.

월드컵 개막일은 다가오는데 이상하게도 언론 매체의 특집이나 관 주도로 이루어지는 개최 도시 경기장 주변, 그 거리의 미화 작업으로 인해 눈길을 끄는 새것의 번쩍임에 비해 국민들의 자발적인 열의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는 붉은 악마의 역동적인 물결에 적극 동참하지는 못하더라도 월드컵조직위원회의 사이버 캠페인이나 월드컵을 매개로 진행되는 양질의 다국적 문화 행사나 첨단 기술 정보를 교환할 수 ‘월드컵 플라자’를 적극 활용함으로써 월드컵을 스포츠이자 예술, 초국가적 이벤트이자 개개인의 삶의 축제로 경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가지고 있다.

‘한때나마’ 무엇에 미처보지 않고, 한때나마 파우스트처럼 악마에게 혼을 팔아보지 않고는 진정한 사랑이나 열정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한때나마 또는 ‘단지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시작된 팬덤의 사회학이 월드컵 참가 선수들만이 월드컵 주역이 아니라 전 세계인이 열광의 주역인 ‘이것은 월드컵이 아니다’라는 또다른 기록 영화를 월드컵을 앞두고 꿈꾸어본다.

함정임<본지 자문위원·사진>소설가 etrelajiha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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