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

  • 입력 2002년 3월 22일 17시 40분


멕시코 반란군 부사령관 마르코스
멕시코 반란군 부사령관 마르코스
◇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마르코스 지음 윤길순 옮김/768쪽 1만8000원 해냄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는 나를 잡고 싶다면, 좋다. 정부군 30명만 투입해다오. 난 지금 총알 서른 한 알이 있는데, 서른 알은 그들을 향해 쏘고, 마지막 한 알은 피로에 지친 내 한 몸의 안식을 위해 쓰겠다.”

비장한 시구절을 연상시키는 이 말의 주인공은 멕시코 사파티스타 반란군 부사령관 마르코스. 국제기사에 익숙한 독자라면 매력적인 푸른 눈만을 보이며 검은 스키마스크를 쓰고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있는 그의 얼굴을 기억할 것이다.

맨 앞 문장은 95년 1월 멕시코 정부가 당시 급격한 페소화 가치 하락의 책임을 사파티스타 민족해방전선(EZLN) 쿠테타로 인한 불안으로 돌리면서 EZLN의 실질적 지도자 마르코스를 공개 수배하자 그가 멕시코 대통령 세디요에게 보낸 공개 편지의 한 구절이다.

결국 세디요는 그를 체포하지 못했다. 그를 지지하는 전 세계 온 오프라인 언론과 지식인들의 동조 때문이었다.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는 1994년 1월 2일 “전쟁을 선포한다!”는 그의 치아파스 주 라칸도나 정글에서의 첫 선언문부터 1999년 11월 1일에 쓰여진 마야의 창조신화 ‘포폴 부’에 나오는 우화를 당시 정치 상황에 빗대어 소개하는 ‘빛과 꽃, 새벽’에 이르는 총 86개의 마르코스의 글들을 묶은 책이다. 제 1부 ‘가면을 벗지 않는 멕시코’는 정치적 선언문 모음이고 제 2부 ‘가면 밑에서’는 인간 마르코스의 진면목과 그의 사상을 보여주는 수필과 우화 모음집이다.

자신을 ‘법을 어기고 산 속으로 도망친 별 볼일 없는 범법자’라고 스스로 칭하는 그는 자신의 표현대로 ‘역사에 틈새를 내기 위해서’ 혹은 루카치의 표현대로 ‘존재를 충만하게 밝히는 별’을 찾아 치아파스의 산 속을 헤매는 고행자이자 순례자이며 철학자다. 그는 현대 사회를 ‘사람들의 고독이 서로의 고독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 더 많은 고독을 만들어 내는 거울의 도시’라 부른다. 그러기에 거울의 뒷면에 조각을 하여 유리가 되어 이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저쪽을 보고, 종국에는 이 유리도 깨뜨려 저쪽에게로 건너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근대성에 대한 비판과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에서의 윤리적 문제를 이보다 간명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해방철학자 엔리께 두셀은 칼 오토 아펠의 상호 소통이론에 입각한 윤리학을 비판하면서 ‘타자에 대한 배려라는 것도 그 도구가 이성이라면 그것은 서구 근대성의 자기확장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주체와의 타자와의 새로운 공동체적 관계를 모색한다. 그가 찾은 예 중 하나가 바로 마르코스가 투쟁하는 치아파스주에 거주하는 인구 8만의 토호로발족의 언어이다.

그들의 언어에는 목적어가 없다. 나와 타자라는 구분보다는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이 깊게 배어있다. 마르코스의 글을 통해 드러나는 그들을 비롯한 멕시코 원주민의 우화는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반면교사의 역할을 한다.

어쨌든, 아직도 치아파스 대치 국면은 지속 중이며 반란군 군대에 가담한 농민들은 산 속에서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

송상기 고려대 서어서문학과 교수

sangkee@korea.ac.kr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