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열규/'태양메달'을 건 김동성

  • 입력 2002년 2월 27일 18시 29분


스포츠를 생각하고 올림픽 경기를 생각할 적마다 절로 연상되는 게 둘 있다. 하나는 체조 경기를 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조각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인들이 신전과 나란히 자리잡게 한 ‘스타디온(운동경기장)’이다.

누구나 알고 있다시피 마라톤과 올림픽 경기의 발상지는 그리스다. 그러기에 필자는 이들 두 가지 기념비적 문화 유산을 통해 원천적이고도 근본적인 차원의 스포츠 및 올림픽 정신을 생각해 보고 싶다.

▼노름판 같은 동계올림픽▼

운동하는 바로 그 순간 포세이돈이 지어 보이는 몸매는 인간 육신이 성취할 수 있는 역학과 미학의 완벽한 조화다. 인간에게서 육화(肉化)된 신성(神聖) 그 자체다. 이 정신은 운동경기장과 신전을 담으로 가름하지도 않은 채 서로 나란히 있게 한 데서도 강조된다. 신을 섬기는 최고의 인간 몸짓이 곧 스포츠였다고 그리스인들은 믿고 있었을지 모른다. 예배보다는 춤과 운동경기로 신을 섬긴 그리스인들이라 이 믿음은 극히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만큼 그리스를 돌아볼 적마다 스포츠의 신성함, 스포츠의 거룩함은 강조되어야 한다. 승부, 성적의 순차, 메달의 빛깔과 수효 등으로 이 원천적인 스포츠 및 올림픽 정신을 깔아뭉갤 수는 없다. 그것은 또 다른 신성 모독이요, 성희롱 아닌 스포츠 희롱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깡그리 올림픽의 우상, 아둔하고 오염된 우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우상들이 민족 차원이나 국가 규모의 패너티시즘, 이를테면 광기와 열정이 한데 뒤엉킨 열광(熱狂)과 야합함으로써 올림픽에서의 우상숭배는 더 이상 나빠지려야 나빠질 수 없는 극악한 상태에까지 내달았다. 극단적인 경우, 올림픽 경기가 경마장이나 경륜장과 다를 게 없게 되었다면 지나친 말일까. 메달 ‘따먹기’가 판을 치면 카지노와도 구별할 수 없게 된다.

20세기를 넘기면서 민족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패너티시즘은 정치 차원에서는 웬만큼 기울어졌다. 그래서 세계사를 위해 퍽 다행인가 했더니 그게 아니다. 그 악의 유산을 스포츠, 특히 올림픽 경기가 이어 받았다. 우리 세기 오직 하나의 대표적인 패너티시즘이 스포츠와 올림픽 경기에 기식(寄食)하고 있다. 2002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경기대회를 주관한 미국인은 그 전형이지만 우리들도 ‘스포츠 패너티시즘’을 십분 경계해야 한다. 솔트레이크시티의 소금(솔트)은 썩었지만 우리는 스포츠의 소금이라야 하기 때문이다.

소위 축구 경기장의 ‘훌리건’은 스포츠 패너티시즘을 대표한다. 그것에 팬돔(스포츠팬의 의식과 행동 양식)이 가세하면 인간 감정의 태풍이 분다. 한데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경기대회에서는 주최자며 심판이 바로 ‘훌리건’이 된 느낌이다. 김동성 선수가 메달을 놓친 화풀이로 개를 발로 차서 잡아먹었을지도 모른다고 한 미국 NBC방송의 진행자 제이 레노는 바로 ‘방송 훌리건’이 아니면 뭐냐는 느낌이 든다.

그 느낌은 이제 한국인만의 국민 감정에 그치지 않는다. 러시아와 일본에서도 비슷할 테니까. 동서양을 넘어 범 세계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주최국, 미국을 제외하고서 말이다.

올림픽 경기에서도 세계를 이끄는 쌍두마차의 한 쪽 말이던 소련이 무너지자 이제 미국은 단두마차 아닌 ‘나 홀로’의 탱크가 되었다.

▼다윗,거인 골리앗 물리치다▼

걸핏하면 미합중국은 ‘멜팅 폿(melting pot)’, 곧 이질적인 것을 하나로 녹이는 용광로라고 자랑한다. 그런 그들이 스포츠에선 별나게 배타적인 ‘자물통’임을 솔트레이크시티는 과시했다. 그러나 분노만 하고 있어선 안 된다. 그 분노로 해서 우리들마저 스포츠 패너티시즘의 수렁에 빠지면 안 된다. 그럼 저들과 다를 게 없게 됨을 경계해야 한다.

이제 저 솔트레이크시티의 주최자들에게, 그리고 미국의 스포츠 관계자들에게 한 수 가르쳐야 한다. 저들에 의해서 스포츠가 입은 상처와 올림픽이 당한 수모를 고대 그리스를 되돌아보면서 일깨워 줄 수 있어야 한다.

한데 김동성 선수 자신이 이미 그 가르침의 본을 스스로 보여주었다. 그가 수모를 당한 직후 또 다른 경기에 흔연히 나섰을 때, 가르침은 실천된 것이다. 메달 따기를 넘어선 스포츠맨십을 그는 보여주었다. 그 해맑은 스포츠맨십으로 그는 거인 골리앗을 이긴 작은 다윗으로 개선했다.

그는 금메달을 빼앗기고, 아니 빼앗겼기 때문에 오히려 눈에 안 보이는 ‘태양 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다.

김열규 인제대 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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