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고승철/혈세로 정치자금 주겠다고?

  • 입력 2002년 2월 24일 17시 36분


‘정치는 쇼 비즈니스’라고 갈파한 학자가 있다. TV를 통해 정치인들의 겉모양(appearance)을 그럴듯하게 알려 실재(reality)도 훌륭한 인물인 것처럼 착각하게 하는 현대정치 행태의 한 단면을 꼬집은 주장이다.

한국의 ‘정치 1번지’인 국회의사당과 쇼 프로그램을 주로 공급하는 TV방송사들이 공교롭게도 여의도에 몰려 있다. 상당수 정치인과 쇼 무대에 등장하는 연예인은 공통점이 많다. 대중의 인기를 바탕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아무리 피곤해도 TV 카메라 앞에만 서면 신들린 듯 에너지가 넘치는 몸짓을 한다. 외모에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대선주자 가운데도 피부 미용시술을 받은 이가 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금배지’를 달아 본 적이 있는 어느 코미디언은 “의사당엔 코미디 고수들이 워낙 많아 나는 제대로 명함도 못 내밀었다”고 우스갯소리로 정치판 상황을 묘사하기도 했다.

양자 사이엔 차이점도 많다. 쇼 비즈니스 종사자들은 스스로 벌어서 살아가지만 정치인 대다수는 ‘돈줄’을 외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 가장 큰 차이다. 물론 정치자금은 좋은 의미에서 보자면 공익성격이 강하다. 개인의 치부를 위한 것이 아니므로 사회적 비용으로 간주해야 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정치자금을 조성하는 과정과 사용처가 불투명하면 공익성격이 희석된다. 기업과 기업인의 약점을 잡아 무리한 헌금을 강요한다든가 모은 돈을 ‘보스 정치’용으로 독식하면 공익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최근 전경련과 경총이 올해 양대 선거에서 떳떳하지 못한 정치자금을 제공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개발도상국에서 흔히 나타나는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겠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도 하다. 지난 날 한국에서는 집권자의 눈밖에 나면 기업의 문을 닫아야 하는 사례가 없지 않았다. 반대로 권력자에게 거액의 ‘통치자금’을 대주고 그의 전폭적인 뒷바라지에 힘입어 승승장구한 기업도 많았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기업환경이 꽤 변했다. 대부분 대기업엔 외국인 투자 몫이 크게 늘어 경영진이라도 회사의 돈을 마음대로 쓰지 못한다. 회계의 투명성을 요구받는 바람에 ‘비자금’을 조성하는 일이 매우 어렵게 된 것도 사실이다.

또 정부의 후원을 받는다 해도 기업이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어지고 있다. 이 정부 출범 초기에 대북 사업으로 정부와 밀월관계였던 현대그룹의 쇠퇴가 이를 입증한다.

이제 정상적인 기업이라면 음성적인 정치자금을 제공하기도 곤란하고 이를 준다 해서 큼지막한 떡을 얻기도 어렵게 됐다. 다만 ‘털면 먼지가 날’ 기업인이라면 신변보호용 보험료 차원에서 개인 재산을 기부할지 모르겠다.

정부는 재계의 불투명한 정치자금 제공 거부에 화답하고 나섰다. “기업이 부당한 정치자금 굴레에서 해방되도록 정부도 노력할 것”이란 진념(陳稔) 경제부총리의 축사가 그것. 이에 앞서 진 부총리는 사석에서 “법인세율을 1%포인트 내려 이 재원을 정치자금으로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이 방안에 대해 여론은 일단 냉담할 것 같다. 고비용 저효율의 정치 행태에서 탈각(脫殼)하려는 정치권의 노력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세금을 쓴다는 데 대한 저항심리이리라. 정치를 희화화(戱畵化)하는 비판론자는 “저급 코미디를 양산하는 정치인에게 국민 혈세로 출연료를 지급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질타하지 않겠는가.

고승철 경제부장 che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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