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장훈/싸움닭 의원,타이타닉 국회

  • 입력 2002년 2월 19일 18시 32분


엊그제부터 국회에서는 한 여당의원의 원색적인 발언을 계기로 해서 의원들의 집단퇴장, 멱살잡이, 의사일정 중단이라는 실로 한심한 장면이 다시 연출되고 있다. 나라가 처해 있는 상황이 심상치 않고, 국회가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상태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파행을 지켜보면서, 영화 ‘타이타닉’에서 본 호화유람선 타이타닉호 침몰 당시 선상의 장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당시 타이타닉호에 타고 있던 일부 졸부들은 배가 빙산과 충돌한 후에도 최첨단 기술로 만들어진 호화유람선이 쉽게 침몰할 리 없다는 그릇된 생각에 더 많은 보석과 돈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었으나, 이들은 결국 배와 함께 물 속에 가라앉고 말았다.

▼저질발언 멱살잡이 한심▼

요즘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염증은 위험수위에 다다라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야 의원들이 당리당략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모습을 연출하는 것은 자신들이 타고 있는 정치권이라는 배는 절대로 침몰하지 않는다는 그릇된 확신 때문일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정치인들은 국회에서 어떠한 추태를 부리더라도 국회의원이라는 자리에서 쉽사리 퇴출되지는 않는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듯하다. 오로지 당의 총재에게 충성심을 과시하고, 그것을 인정받기만 한다면 언론이나 여론이 무어라고 하든 의원직을 계속 유지하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믿는 것이다. 또한 정치인들이 당의 총재나 보스의 신임을 얻는 데에는 활발한 의정활동보다는 과격발언이나 돌격대 역할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저질의원은 언제까지나 정당 보스의 보호막 아래서 무사하고, 국회는 결코 침몰할 가능성이 없는가. 유감스럽게도 퇴출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운 국회의원은 있을 수 없고, 국회가 국민들로부터 버림받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먼저 의원들의 경우를 보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당 보스가 공천을 챙겨주기만 한다면 문제가 있는 의원도 어렵지 않게 재선되고 의원직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지역의 맹주로 자처하는 3김이 내려보내는 후보는 자질이나 능력에 상관없이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어 당선될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처럼 지역 맹주들이 거의 퇴장하고 상향식 공천이 시대의 흐름이 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는 보스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이 공천을 보장하지 않는다. 설사 천신만고 끝에 공천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자질이나 경력을 의심받는 후보가 선거에서 당선되는 일은 이제 과거의 일이 되었다. 이미 2000년 총선에서도 확인된 바와 같이 유권자들은 문제가 있는 후보, 낙선리스트에 오른 후보의 대부분을 표를 통해서 퇴출시킨 바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같은 퇴출은 몇몇 불운한 사람들의 사정일 뿐이라고 믿는 것은 정치인들 나름의 계산 때문일 것이다. 시장경제에서는 경쟁력을 상실한 기업이 문을 닫을 수 있고, 보다 나은 가격과 품질을 위해서라면 외국으로부터 상품을 수입하는 것이 합리적이지만, 양질의 국회의원을 외국에서 수입해올 수 없다는 것을 이들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정치의 세계에서도 충성-불만-퇴출로 이어지는 품질관리의 메커니즘이 간헐적이지만 엄격하게 작동한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비록 시장경제에서처럼 일상적으로 벌어지지는 않지만, 시민들은 분명히 정치인들의 활동을 평가하고 충성-불만-퇴출의 사이클을 통해 정치의 질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자신들의 정치적 대표인 정치인들이 비교적 만족스럽게 정치를 꾸려나갈 때 시민들은 이들에게 충성을 보낸다.

▼유권자 票로 퇴출시켜야▼

하지만 시민들의 지지와 충성을 받던 정치인들의 역할 수행이 점차 악화되어갈 때 시민들은 1차적으로 이들에게 불만의 신호를 보내게 된다. 이러한 불만은 정치권에 대한 불신, 혐오, 투표 기권 등의 현상으로 표출된다. 그런데도 이러한 불만이 정치권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현상이 지속될 경우 시민들은 최종적으로 퇴출이라는 가혹한 제재를 가하게 된다. 민주정치에서 이루어지는 퇴출은 흔히 투표거부운동, 대규모의 낙선운동, 대안적 정당운동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우리 정치의 현주소는 어디에 와 있는가. 분명 충성과 불만의 단계는 지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제 우리 정치가 집단적인 퇴출 단계로 접어들지, 아니면 충성의 단계로 회귀할 것인지는 오직 정치인들의 각성에 달려 있다.

장훈 중앙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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