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세살 꼬마가 본 세상 '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

  • 입력 2002년 2월 15일 17시 41분


이토록 아름다운 세살/아멜리 노통 지음 전미연 옮김/189쪽 6800원 문학세계사

어느 날 쇼펜하워는 회고록을 쓰기로 마음먹었다고 전해진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 온 날들을 돌아보니…’로 시작되는 반성적 산문이었단다. 아홉 살 때였다던가.

어린이가 회고록을 쓴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일까. 그렇다면 아멜리 노통의 소설 ‘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원제·튜브의 형이상학·M´etaphysique des tubes)을 집어들어도 좋을 것이다.

세 살 짜리가 여태까지의 삶을 회고한다는 가정에서 이 책은 출발한다. 그 짧은 연대기를 엮어가는 방식은 철두철미 노통다운 블랙 유머와 잔인하리만큼 섬뜩한 풍자, 기존의 존재론적 성찰들을 살짝 비트는 자기만의 철학명제들로 채워진다.

자폐적 성향이 있어 어떤 자극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던 아기. 무(無)에서 충만을 느끼며 스스로를 신(神)으로 느낀다. 출생 후 2년이 지나서야 할머니가 건네준 화이트 초콜릿의 쾌락에 힘입어 아기는 비로소 ‘삶’을 깨닫는다. 의식 자체와 인식 대상으로서의 자아가 분화된 모습을 작가는 다음과 같이 상쾌하게 표현한다. “나야! 내가 살아 있는 거야. 난 너의 제일 친한 친구야. 너에게 쾌락을 느끼게 해주는 게 바로 나니까 말이야.”

처음 세상을 대면하게 된 아기에게는 세상의 인과율(因果律)도 제멋대로 뒤집히고 왜곡된 채 존재한다. 그런 왜곡마저도 나름대로의 체계를 갖는다는 데서 독자는 웃음 속의 긴장을 놓칠 수 없다.

“초콜릿은 내가 필요해.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덩어리에 불과하지만, 내 입속으로 들어가면 그건 쾌락이 되거든.”

“어느 날 저녁, 나는 봉오리가 올라온 줄기를 보고 ‘꽃을 피워’하고 말했다. 다음날 그것은 활짝 핀 백작약꽃이 되어 있었다. 내가 없었을 때는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슬펐을까!”

인식에 대한 명상들만으로 이 세 살짜리의 삶이 육중하게 채워졌을 것으로 본다면 속단이다.

벨기에 영사로서 일본의 전통연극 노(能)를 배우며 일본사회에 친밀감의 제스처를 내보이려 하는 아버지, 불우한 노년에 이르기까지 귀족의 오만함과 외국인에 대한 경멸감을 키워나가는 가정부 ‘카시마상’의 모습 등이 어린이의 시선 속에서 경쾌한 스텝으로 우스꽝스럽게 펼쳐진다.

“유년기는 가장 강렬한 시기인 것이 분명하다. 그때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어른이 되어서는 더 이상 대단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글쓰기는 내게 있어서 유년기를 연장시키는 또다른 방법이다”라고 작가는 설명한다.

작가의 프로필을 접한 사람은 이 풍자소설이 실제의 유년체험에서 착안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노통은 외교관의 딸로 일본에서 태어나 세계를 돌아다니며 청소년기를 보냈고 25세때 처녀작 ‘살인자의 건강법’이후 잔인함과 유머, 그로테스크와 풍자를 결합시킨 소설을 매년 꼭 한편씩 선보여 프랑스어권에서 가장 각광받는 젊은 작가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벨기에 여성의 우스꽝스런 일본기업 체험기 ‘두려움과 떨림’ 등이 번역 소개됐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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