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朴'에 맞춰 자리만들어서야

  • 입력 2002년 2월 3일 20시 13분


1·29 개각으로 청와대에 복귀한 박지원(朴智元) 정책특보에 대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감정은 ‘편애(偏愛)’ 수준을 넘어 ‘중독(中毒)’에 가까운 느낌이다.

포폄(褒貶)을 떠나 그동안 그는 직책에 상관없이 ‘김심(金心)’의 전달자이자 여론수렴의 통로역할을 해온 게 사실이다. 청와대 주변에서 “대통령이 너무 외로웠다” “말귀를 알아듣는 사람이 없다”는 다소 황당한 얘기가 흘러나오는 것이나 청와대 주변사정을 잘 아는 민주당 관계자들이 “비판여론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선택”이란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일 것이다. 결국 그의 ‘빈자리’를 견딜 수 없었던 김 대통령은 고육책으로 ‘정책특보’란 새 자리를 만들었다.

문제는 과거의 예를 돌아볼 때 이처럼 ‘사람’을 따라 ‘자리’가 만들어지는 위인설관(爲人設官)이 통치필요에 의한 변칙적인 권력운영과 동전의 안팎과 같은 관계를 유지해왔다는 점이다. 실제 5공 이후 이뤄져온 위인설관의 역사는 대통령의 신임을 업은 사적인 조직이 제도로서의 공조직을 압도했던 상궤를 벗어난 상황전개와 맥을 같이 한다.

여기에다 특정인을 위해 자리를 만들다보니 직무 범위가 모호한 데다 사람이 물러나면 자리가 없어졌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몇 가지 예를 보자.

80년 9월 5공 정권이 출범할 때 ‘전두환(全斗煥) 대통령 만들기’의 주역이었던 허화평(許和平) 전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이 맡은 직책은 ‘대통령 비서실 보좌관’이었다. 그는 다른 수석들과는 달리 청와대 본관 접견실 옆에 사무실을 두고 국정전반에 관여했다. 그러나 그가 81년 12월 정무1수석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기자 이 자리는 없어졌다.

노태우(盧泰愚) 대통령 시절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둘렀던 박철언(朴哲彦)씨의 직책은 ‘정책보좌관’이었다. 이 자리도 그가 89년 7월 정무장관으로 옮겨가면서 없어졌다.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집권 프로그램을 만든 ‘동숭동팀’의 주역인 전병민(田炳旼)씨에게 93년 2월 청와대 비서진 내정자 발표 당시 주어진 직책은 당시 새로 만들어진 ‘정책수석’이었다. 그러나 그의 장인이 고하 송진우(古下 宋鎭禹) 선생의 암살범임이 드러나 5일 만에 낙마하자 정책수석실은 폐지됐고 사회문화수석실이 신설됐다.

이처럼 필요에 따라 신설됐다가 폐지됐던 권력핵심부의 여러 자리에는 대부분 ‘부통령’‘황태자’ 등 실세임을 입증하는 별칭이 수식어처럼 뒤따랐다. 벌써부터 박 특보의 위상도 ‘왕(王) 특보’란 이름으로 대변된다.

이런 별칭들은 6공 이후 진전돼온 민주화의 제도화 공고화라는 시대의 흐름에 역행, 통치의 편의 때문에 권력이 이중구조화되는 왜곡현상이 빚어졌음을 상징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어느 체제 아래서든 제도로서의 자리는 보편적 객관적인 기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 반면 사람에 대한 판단은 주관적인 것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丁若鏞) 선생이 목민심서에서 “자리에 맞춰 사람을 써야지 자리가 사람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 것도 바로 자의적 권력행사의 틈을 우려한 얘기다.

박 특보 자신을 비롯한 청와대 관계자들의 거듭된 ‘국정 온리(Only)’ ‘원톱 시스템’이란 다짐에도 불구하고 청와대쪽에 자꾸 걱정의 시선이 쏠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d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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