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눈]필립 골럽/유럽이 나설 때다

  • 입력 2001년 12월 19일 18시 02분


냉전 이후 미국은 국제무대에서 독보적인 국가였다. 세계의 정치 경제 분야에서도 지배력을 행사해 왔다.

역사를 돌아봐도 오늘날의 미국 같은 부와 영향력을 가진 나라는 없었다. 19세기의 대영제국과 달리 미국은 전략적 적국을 갖고 있지 않다. 경제적 라이벌인 유럽과 일본도 미국의 정치적 파트너다.

▼미국 독주에 안정 흔들려▼

로마제국과 달리 미국은 영토적 야심이 없으면서도 글로벌 파워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미국의 기술적 수준과 군사적 힘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여실히 증명됐다.

문제는 사상 유례 없는 그 파워를 어떻게 쓰느냐다. 미국 내 일부 평론가들은 21세기에도 국제무대에서 미국의 주도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협력보다 힘을 선호하는, 미국 우선주의 정책을 강조하고 있다.

이들은 최근 폴 울포위츠(국방부 부장관)나 리처드 펄(국방부 안보기획국장) 같은 미국 정부의 고위 관리들과 함께 테러와의 전쟁을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라크나 시리아 같은 다른 중동 국가로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출범 초부터 세계 정책의 근간으로 내세워 온 미국 일방주의를 지탱하는 데 주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9월 11일 이후 많은 외국 관측통들은 동맹구축과 다각적인 협력을 필요로 하는 테러와의 전쟁이 미 행정부의 세계관을 변화시킬 것으로 기대했다. 그리고 실제로 몇 달간 미국 정부는 일방주의의 톤을 낮췄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끝나가면서 더 이상 동맹국들과의 파트너십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자 미국의 일방주의자들이 다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최근 부시 행정부는 72년 체결된 탄도탄요격미사일(ABM) 협정을 일방적으로 탈퇴하기로 결정했다. 생물무기협약(BWC)의 검정의정서 수용도 거부하고 있다. 국제형사법의 질서를 뒤흔드는 군사재판도 열려고 한다. 이는 어떤 기준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ABM 협정 탈퇴는 지각 없는 결정이다. 러시아 중국과 불필요한 마찰만을 불러올 것이다. 설사 가상적인 위협이 있다 하더라도 미국 내에 탄도탄요격 시설들을 조기 배치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어떤 나라가, 심지어 ‘불량국가(Rogue State)’라 하더라도 미국에 핵미사일을 날려 즉각적인 파멸을 자초하려 하겠는가.

테러리스트는 핵미사일보다는 방사능 물질이 포함된 손가방 크기의 핵무기를 사용할 게 자명하다. 이런 위협에 대응하는 데 탄도탄요격 미사일 기술은 아무 쓸모 없다.

더욱이 ABM 협정은 미사일방어체제의 연구까지 금지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은 협정을 탈퇴하지 않고도 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해결책을 강구할 수 있다.

생물학무기에 대한 결정은 더 타당성이 떨어진다. BWC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따라서 엄격한 사찰 체제가 생물학 테러의 위험을 감소시킬 수 있다.

그런데도 부시 행정부는 국제기구가 미국의 생물학무기 시설을 사찰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다른 나라의 시설을 사찰하는 것은 좋지만 미국이 사찰당하는 것은 못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일어난 탄저병 테러에 사용된 균이 미군 실험실에서 나온 변종이었는데도 미국은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요약하면 미국 정책의 기조는 국제주의가 아니라 민족주의다.

▼‘세계경영의 새 리더’ 필요▼

이는 위험한 선례가 될 수 있다. 미국 자신이 국제규범과 체계, 절차 등에 구속받지 않으려 한다면 앞으로 어떤 국가가 이런 것들을 따르려 하겠는가.

제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 지도자들은 힘이 책임을 동반하고 강대국의 지위는 더 큰 책임을 의미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그 계승자들은 안정과 번영에 기여하는 다면적인 제도적 시스템을 구축해 실제로 국익을 효율적으로 추구했다.

그러나 오늘날 부시 행정부는 미국 우선주의의 깨어진 꿈을 추구하느라 그런 제도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그렇다면 미국이 등한시하고 있는 세계 경영에 대해 책임을 질 다른 배우가 필요하다. 중동과 같은 민감한 지역에서 동북아와 남아시아의 목소리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유럽이 나서야 한다. 만일 유럽연합이 앞으로 20년간 세계의 새로운 체제를 형성하는 데 발언권을 갖고자 한다면 행동을 하나로 모아야 할 때다.

필립 골럽(프랑스 파리 제8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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