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김태한/책임안지는 불평등계

  • 입력 2001년 12월 13일 18시 15분


“미국 퀄컴만 탓할 일이 못됩니다. 문제는 그런 불평등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쪽에 있습니다.”

미국에서 경영학을 가르치는 한 한국인 교수는 부호분할다중접속(CDMA)방식 로열티 문제와 관련해 최근 기자에게 e메일을 보내 이렇게 말했다. 그는 “퀄컴에 주는 막대한 로열티를 배 아파하기 전에 계약을 체결한 한국 협상단의 무지를 탓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부와 기업이 퀄컴을 상대로 벌여온 CDMA 로열티 재조정 작업이 사실상 무산되면서 ‘불평등 계약’을 둘러싼 책임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계약 책임론의 요지는 10년 전만 해도 무명에 가까운 퀄컴이란 벤처기업의 신기술(CDMA)을 도입한 한국이 계약상 우월 위치에 있었는데 왜 일방적으로 불평등한 조건을 받아들였느냐는 것.

전문가들은 특히 한 나라의 통신시장을 내주는 제휴를 하면서 주식 교환이나 지분 참여를 빠뜨린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며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한국 정부나 기업이 계약을 통해 퀄컴사의 주식 20% 정도만 확보했다면 상황은 크게 바뀌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통신업계의 한 관계자는 “누가 봐도 불평등한 이런 계약이 이뤄진 것이 신기하다”고 꼬집었다. 95년 이후 국내 기업이 낸 로열티 총액은 벌써 11억달러를 넘었다.

CDMA기술은 91년 전자통신연구소(ETRI·현 전자통신연구원) 경상현(景商鉉) 소장과 윤동윤(尹東潤) 체신부차관이 도입 작업을 지휘했다. 92년 ETRI-퀄컴간 최종 계약서에는 양승택(梁承澤) 당시 ETRI소장이 한국측을 대표해 서명했다. 이들 중 양 소장은 현재 정보통신부 장관이며 경 소장과 윤 차관도 각각 정통부 및 체신부장관을 지냈다.

CDMA가 한국의 통신산업에 기여한 공로는 인정된다. 또 해외 주요 기업이 기술 이전을 꺼리는 상황에서 한국측이 새로 등장한 CDMA기술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90년대 초의 사정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계약 협상을 둘러싼 무지와 실수로 두고두고 부담을 짊어지게 됐는데도 ‘불평등 계약’의 주역 중 누구도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납득하기 어렵다.

김태한<경제부>freewil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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