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재호/美 ‘아랍 민주화’ 나서라

  • 입력 2001년 11월 25일 18시 25분


미국의 아프간 전쟁은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탈레반 정권은 사실상 붕괴됐고 오사마 빈 라덴의 체포도 임박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영국도, 옛 소련도 울고 나왔다는 거칠고 험한 땅에서 미국은 초강대국으로서의 힘을 유감없이 발휘해 보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제 미국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미국은 확전(擴戰)을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테러를 뿌리뽑기 위해서 이라크까지도 공격할 용의가 있음을 내비치고 있다. “전쟁은 이제부터”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책이 아니다. 그런다고 테러가 사라질까.

안와르 이브라힘 전 말레이시아 부총리는 최근 시사주간지 타임에 기고한 글에서 “아랍 국가들의 민주화를 앞당기는 것만이 궁극적인 해결책”이라고 했는데 문제의 본질을 꿰뚫는 지적이다. 정치참여의 확대, 시민사회의 성숙, 인권의 신장을 통해 아랍 국가들을 민주화시키지 않고서 테러의 근절을 기대할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이다. 빈 라덴을 잡아넣으면 제2, 제3의 빈 라덴이 나오게 돼 있다.

아프간 전쟁을 다루면서 나는 이슬람 사회의 이른바 ‘명예로운 살인’의 관습에 충격을 받았다. 가족 중 누군가가 집안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생각되면 가족회의를 열어 그의 목숨을 앗을 수 있는 이 비극적 악습은 아랍 사회의 인권의 실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였다.

아랍권에선 이혼한 누이는 집안의 수치다. 그래서 오빠나 남동생이 누이를 살해하는 일이 빈번하다. 깊은 산 속으로 데리고 가 총으로 쏘아 죽이는 것이다. 혼전에 순결을 잃은 여동생이나 딸도 마찬가지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이런 식의 ‘명예 살인’이 지난해에만 5000건 이상 발생했다.

인권과 민주화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아랍 국가들은 대부분 전제 왕정(王政)체제다. 일부는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있지만 참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제대로 된 야당도, 의회도 없고 언론의 자유도 없다. 인권을 보호해 줄 어떤 사회적 안전판도 없는 것이다.

인권 부재의 비민주적 사회 속에서 통치자들이 국민에게 요구하는 것은 서방(西方) 사회에 대한 끝 모를 적개심이다. 그들은 성전(聖戰)이라고 하나 사실은 체제유지를 위한 방편의 성격이 짙다. 이런 환경과 풍토 속에서 테러의 싹은 끊임없이 돋아난다.

전통적으로 국제정치학자들은 민주화된 국가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지구상에서 전쟁이 일어날 확률은 낮다고 보았다. 민주주의가 갖고 있는 여러 형태의 견제와 균형의 장치들이 특정 지도자가 순간의 비이성적 판단에 빠져 무모하게 전쟁(테러)에 뛰어드는 것을 막아준다고 믿었던 것이다.

아랍사회도 이런 인식의 틀로 볼 수 있다. 흔히 “서양의 잣대로 이슬람 사회를 보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인류의 보편적 가치임을 부인할 수 없다면,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테러의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든다면 누군가가 아랍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나서야 한다. 나는 미국이 그 일을 해주기 바란다.

전후 반세기 동안 미국은 석유와 국익을 위해 중동의 독재국가들을 무조건 지지해 왔다. 이 지역이 오늘날 민주화가 가장 덜 된 지역의 하나로 남아 있게 된 데에는 미국의 이런 정책도 일조를 했다. 그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미국은 아랍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팔을 걷어붙여야 한다. 그것이 테러를 근절하는 첩경이다.

이재호<국제부장>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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