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여체와 욕망 향한 '피의 미학' 다룬 '바늘'

  • 입력 2001년 11월 16일 18시 07분


◇ 바늘/천운영 소설집/260쪽 8000원 창작과비평사

이런 여자들을 본 적이 있는가. 어금니로 피가 섞인 쇠고기의 질긴 떡심을 잘라내는 여자(‘바늘’), 씻지도 않은 소골을 선 채로 아귀아귀 집어먹는 노파(‘숨’), 닭다리를 손에 들고 뼈 사이의 연골이나 오돌뼈 등을 오물오물 발라먹는 여자(‘등뼈’).

천운영의 첫 소설집 ‘바늘’은 이 엄청난 육식성의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도처에서 피가 튀고 뼈가 갈라진다. 갓 태어난 새끼고양이가 변기통에 처넣어지는가 하면 기차가 덜컹 철로변에 누운 머리를 짓뭉개고 가는 환상이 제시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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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하여 ‘살육의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문신, 도살에서부터 회뜨기에 이르기까지 이 신예 작가가 다루는 소재는 우리 소설사에서 지극히 낯설고도 도발적인 것들이다. 우리 소설사는 마침내 이 당돌한 작가에 의해 ‘피의 미학’이라고 할 만한 것을 경험하게 된 것 같다.

그러나 피와 함께 폭력을 떠올릴 필요는 없다. 피는 폭력을 부르고 폭력은 또 다른 피를 부른다는 일반론은 이 소설집과 무관하다. 천운영은 폭력의 기원을 파헤치기 위해 피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에게 있어 피는 그 자체 관능적 탐미의 대상이자 추구해야 할 진실이다.

“숨을 죽이고 살갗에 첫땀을 뜨면 순간적으로 그 틈에 피가 맺힌다. 우리는 그것을 첫이슬이라고 부른다. 첫이슬이 맺힘과 동시에 명주실이 품고 있던 잉크가 바늘을 따라 천천히 흘러내려온다. 붉은색 잉크는 바늘 끝에 이르러 살갗에 난 작은 틈 속으로 빠르게 스며든다. 마치 머릿속에서 맴돌던 말들이 입밖으로 시원하게 나와주는 듯한 기분.”(‘바늘’)

‘바늘’이 숨막히게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이 소설집의 피는 살갗을 관통하는 ‘고통’과 함께 온다. 그것은 때로 머리가 쪼개지는 아픔으로 변주되기도 하고 심장이 터질 듯한 벅참으로 바뀌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육체’에 가해지는 ‘흔적’을 동반한다는 점에는 변함없다. 피는 언제나 육체적 고통 속에서만 피어난다. 말하자면 피가 있어 육체는 드디어 스스로를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점은 ‘월경(月經)’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생각할 때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월경은 여성성의 기호이자 그것이 점차적으로 여성의 몸에 각인되어가는 과정이다. 혹 천운영은 자신의 글쓰기를 ‘월경하기’에 비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인간, 무엇보다도 여성의 육체와 욕망을 상대로 한 또 다른 의미에서의 ‘문신새기기’의 일종이라는 점에서 이제까지의 글쓰기 영역을 월경(越境)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흥미롭게도 천운영은 자신의 작품 속에 스스로의 소설론을 천명해 놓고 있다. “엄마가 바늘을 가지고 옷감에 수를 놓았다면 나는 인간의 연약한 육체에 수를 놓겠다.”

육체에 수를 놓는 작업은 옷감에 수를 놓는 작업에 비해 ‘살을 파는 아픔’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것은 언제나 육체를 발가벗기고 피를 흘리게 해야 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적나라한 진실을 외면할 수 없게 만든다. 부디 이 명민한 작가가 우리에게 끊임없이 그 진실을 상기시켜주는 ‘참형’을 마다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신수정(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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