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이러니 ‘퍼주기’라고 하지

  • 입력 2001년 11월 12일 18시 23분


정부가 보유 중이던 결핵 백신을 전량 북한에 지원하느라 6일부터 사흘간 전국 보건소에 사용 가능한 백신 재고량이 바닥났다는 믿기지 않는 일이 발생했다. 아무리 인도주의적인 지원도 좋지만 당장 우리가 필요한 것까지 북측에 주는 데 급급해 문제를 일으킨 이 정부의 행태가 한심할 따름이다.

국립보건원측은 사건이 커지자 “국내용으로 추가 생산한 백신의 공급 시기를 잘못 판단해 발생한 실수였다”고 하지만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해명이다. 국내에는 5세 이상 결핵보균자가 43만명, 환자가 17만명이나 있다. 그들 중 생활 형편이 여의치 않은 대다수 서민들은 보건소를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어떻게 보건당국이 결핵 백신의 국내 수급상황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재고량을 모조리 북에 보낼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통상적인 절차로서 해당 부처의 의견을 청취한 뒤 반출승인을 내줬을 뿐”이라는 통일부의 변명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통일부는 정부 및 민간 차원의 대북사업을 총괄 조정하는 기구다. 아무리 이번 결핵 백신 지원사업이 민간 차원의 일이라 해도 통일부가 ‘우리는 상관없다’는 듯한 자세를 보이는 건 잘못이다.

우리는 이번 사태에 일선 행정기관으로서는 거부하기 어려운 ‘윗선’의 결정이 개입돼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애초에 보건당국이 ‘명쾌하게’ 대북지원 결정을 내린 점도 그렇고, 사후에 문제가 커지자 발빠르게 ‘내 책임이오’라고 나오는 태도도 석연치 않다.

근본적인 문제는 물론 이 정부가 줄기차게 견지해온 ‘대북(對北) 퍼주기’ 행태에 있다. 그래서 전 국민을 상대로 한 보건행정보다 대북 지원을 우선시한 이번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렇게 북한에 ‘퍼주기’만 한 결과 우리가 얻은 것은 과연 무엇인지 묻고 싶다.

인도적 차원에서 북측에 의약품을 지원하는 일이 근본적으로 잘못됐다고 나무랄 일은 아니다. 하지만 대북 지원에는 일정한 원칙이 전제돼야 한다. 우리 사정을 도외시하고 ‘퍼주기’만 한다면 결국 대북 포용정책의 효과에 대한 국민적 의구심을 높일 뿐이다.

정부는 일선 실무진의 책임을 묻는 식으로 이번 일을 덮으려 해서는 안 된다. 백신 지원 결정과정과 배경, 경위를 철저히 밝혀야 한다. 이는 대북사업의 투명성과 국민적 신뢰를 높이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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