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백진현/성급한 대응 또 禍부른다

  • 입력 2001년 11월 6일 18시 39분


한국인이 중국에서 마약범죄로 처형된 사건 때문에 외교통상부가 여론의 십자포화를 맞고 있다. 망신, 부실, 무능, 졸속, 무기력 등 거의 모든 부정적 용어들이 다 동원되어 한국 외교에 대한 질타가 이어지고 있다. 또 외교관은 엘리트주의와 무사안일주의에 빠진 가운데 연줄이나 잡아 영달을 바라는 집단으로 묘사되고 있다.

▼'망신외교' 대수술 필요▼

일찍이 정부 부처가 이렇게 혹독한 비난의 대상이 된 적이 있는지 궁금하다. 만약 이것이 모두 사실이라면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다. 동북아시아라는 험난한 지정학적 환경에 처한 우리에게 외교는 국가의 생존과 번영에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과연 외교부가 이 같은 총체적 부실덩어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언론 보도로 판단하건대 이번 한국인 사형사건에 대처하는 외교부의 행태에는 분명 문제점이 엿보인다. 외교부의 일부 인사는 이번 사건을 단순 문서처리 실수를 언론이 과장 보도하는 바람에 부풀려진 사건으로 억울해 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는 두 가지 점에서 문제의 본질을 놓치는 것이다.

첫째는 외교에 있어 판단력의 문제다. 노련한 외교관이라면 중국에서 한국인이 마약사범으로 체포되었을 때 이것이 외교적으로 어떤 파장을 가져올 수 있는 사건인지를 짐작했어야 했다. 또 중국의 형사절차가 선진국 수준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감안할 때 처음부터 중국 정부의 가뭄에 콩 나기식 통보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우리 측에서 더 적극적으로 챙겼어야 했다. 많은 국가들이 마약사범을 엄벌에 처하는 동남아 중국 중동 등지를 여행하는 자국민에게 철저히 주의하도록 경고하고 사건 발생시 적극 대처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도 사건 발생 이후 4년이 넘는 기간에 단 한 차례도 우리 대사관이나 외교부가 사건의 심각성을 인식했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둘째는 외교에 있어 위기대처 능력의 문제다. 이번 사건에 대해 여론이 가장 분노하는 부분은 문서관리의 부실보다 사형집행 사실이 알려진 후 취한 정부의 태도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먼저 사실 파악부터 정확히 하는 것이 순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교부는 사실 규명도 하기 전에 중국 측을 몰아세웠고 대통령까지 유감을 표명하며 가세했다. 외교적 위기상황을 맞아 원칙과 국익보다는 여론의 예봉을 피해 보자는 고려가 앞섰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고 이 과정에서 국익은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올해는 외교부로서는 정말 잊어버리고 싶은 한 해일 것이다. 연초의 탄도탄요격미사일(ABM) 제한협정부터 대일외교 혼선, 꽁치분쟁, 그리고 사형파문에 이르기까지 악재들이 쉴 새 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악재들은 물론 겉으로는 별개의 사안이지만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공통점이 보인다. 한마디로 판단 미숙으로 사태가 불거진 후 여론의 공세를 피하려고 성급한 대응을 하다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패턴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국익 헤아리는 소신 갖춰야▼

탈냉전과 민주화는 외교를 수행하는 대내외적 환경에 근본적 변화를 불러왔다. 냉전종식으로 외교의 지평은 확대되었고 현안은 다양해졌으며 국익은 더욱 복잡하게 정의되고 있다. 또 민주화로 외교의 일거수일투족이 언론과 여론의 감시에 노출되고 있다. 그 결과 외교에 있어 정확한 판단력과 여론의 압력 속에 국익을 지키고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가령 ‘ABM 조약의 강화’를 미국의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으로 과연 일본의 과거사 인식에 근본적 변화가 있었는지, 그리고 남쿠릴 분쟁 수역의 조업이 일본에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정확히 판단했다면 그동안의 외교적 파동의 상당 부분은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이와 함께 국익 수호를 목표로 하는 외교부는 여론을 존중해야 하지만 여론에 영합해서는 안 된다. 때로는 국익을 위해 국민을 설득하고, 필요하다면 여론의 압력에 맞서는 용기도 있어야 한다. 정확한 정세판단과 위기대처 능력, 그리고 여론보다 국익을 헤아리는 소신을 갖출 때 비로소 한국 외교는 거듭날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백진현(서울대 교수·국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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