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B]30대 경영자 2명의 커리어 "토종학력으로 CEO 꿈 이뤘어요"

  • 입력 2001년 11월 5일 18시 40분


“‘국내파’ 최고경영자를 꿈꾼다.”

국내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배움의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고, 토착 직장에서 얻은 기회를 바탕으로 ‘세계 표준’의 비즈니스 기술을 익혀 국제적 경쟁력이 있는 경영인이 된 30대 초반의 남녀들이 늘고 있다.

언뜻보면 지극히 당연한 얘기지만 그간 국내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명문대학을 나온 뒤 외국대학으로 유학을 가거나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마쳐야 되는 것처럼 인식돼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들어 국제적 감각을 갖춘 ‘국내파’들의 진출이 늘면서 유년시절을 미국에서 보내고 돌아오는 ‘연어족(族)’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30대 초반, 그것도 외국계 기업의 임원이라면 “어릴 때 외국에서 몇 년 살다왔겠지”라고 생각하기 일쑤지만 ‘예외’가 늘고 있다. ‘토종’의 두 남녀가 ‘국제적인 커리어’를 쌓아온 과정을 살펴보자.

▼한국 '타테오시안 런던' 정성호 사장▼

세계적인 액세서리 브랜드 ‘타테오시안 런던’ 의 정성호 사장(30)은 일면식도 없던 영국 회사의 최고경영자(CEO)를 e메일 한 통으로 사로잡아 일약 한국시장의 책임자가 된 경우다.

“몇달동안 해외에서 나온 패션잡지, 인터넷 등을 참고하며 ‘타테오시안’에 대한 시장조사를 했습니다. 향후 5년치의 비즈니스 플랜을 30장 분량으로 작성해 ‘한국시장을 나에게 맡겨달라’고 메일을 보냈더니 놀랍게도 바로 다음날 현지 사장으로부터 ‘한번 만나자’는 답장이 왔습니다.”

올 3월에 처음 본사와 연락이 닿은 정 사장은 이후 6개월도 되지 않아 8월에 서울 압구정동 갤러리아백화점 명품관에 타테오시안을 입점시키는데 성공했다. 커프링크스에 나침반이나 룰렛게임기가 달려 있을 정도로 ‘컬트적’인 디자인이 젊은층에 어필, 첫날 백화점 전체에서 매출 1위를 기록했을 정도로 주위의 반응도 좋다.

정 사장은 95년 고려대 경영학과(90학번)를 졸업할 당시만 해도 ‘국내파’의 전형이었다. 방학을 이용해 몇 주간 미국을 다녀온 것이 해외체류 경험의 전부일 정도.

그러나 당시 반(半)외국계 광고회사였던 ‘코래드 오길비 앤드 마더’에 취업하며 영국으로 1년간 신입사원연수를 떠날 기회를 얻었고, 이를 놓치지 않았다.

“정형화되고 보수적인 ‘영국식 비즈니스 스타일’이 미국인을 비롯한 세계인들에게는 아주 ‘쿨(Cool)’ 한 것으로 비치더군요.”

정 사장은 특히 ‘식사시간에 머리를 숙이지 말라’, ‘양말의 색이 옷보다 밝으면 안 된다’, ‘커프링크스를 하지 않으면 넥타이를 하지 않은 것과 같다’는 등 기본적인 비즈니스 룰을 익힌 것이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이후에도 그는 지방시, 아베다 등 국내 외국계 회사에서 커리어를 쌓으며 국제적 비즈니스 감각을 축적했다. 그러나 자비를 들여 외국으로 경영학석사(MBA) 등 각종 학위 취득을 위해 유학을 떠나는 것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2년동안 2억원이 넘는 돈을 유학비용에 투자하기보다는 이왕 제 적성을 일찍 찾은 바에, 그 돈을 제 사업에 투자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죠.”

정 사장은 젊은 나이에, 그것도 짧은 시간에 많은 경험과 경력을 쌓았다. 또 명품 액세서리 회사의 사장이라는 직함 때문에 외관에도 많은 신경을 쓴다. 이런 탓에 그를 외국 학맥과 인맥에 기반을 둔 ‘연어족(族)’으로 오인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의 경영관은 ‘철저하게’ 보수적이다.

“제가 사장으로 있는 한 우리회사에 취업한 사원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평생직장’ 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겁니다.”

▼'호한재단' 한국총책임자 이효진씨▼

“영어회화책을 다 외웠죠. 무작정 외우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들도 많지만, 아직도 국내에서 영어공부하는데 외우는 것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호주대사관 내 호한재단의 한국측 총책임자로 있는 이효진 사무차장(34·여). 해외파들이 많기로 유명한 대사관에 ‘신토불이’ 학력으로 91년 입사한 이후 고속승진을 거듭해 지금의 위치는 대사관 내 한국직원 중 ‘넘버3’다. 토익이나 토플 성적이 만점을 기록할 정도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의사소통 기술’을 익히는데 주력해 일찌감치 인정을 받았다.

물론 그녀도 20대 시절에는 당당하고 화려해 보이는 외국인들을 접하며 ‘유학은 꼭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상대방으로부터 발음이나 사고방식에 있어 ‘한국적 정체성’을 인정받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을 확신하게 됐다.

“비즈니스에서는 하고싶은 말을 얼마나 정확하고 분명하게 전달하느냐가 핵심입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미국에 몇년을 살았는지, 또는 본토 발음을 구사하는지에만 신경을 쓰는데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차장은 ‘최신 영어’는 단어선택이나 표현방식에 있어 미국을 벗어나 자국의 문화와 정체성을 담아내는 경향이 많다고 말한다. ‘콩글리시 콤플렉스’를 벗어나 싱가포르나 유럽인들처럼 ‘차별화된 영어’를 구사하는 것도 자신의 성향을 외국인들에게 분명히 인식시켜줄 수 있는 ‘전략’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는 경기대 경영학과 재학시절 88올림픽에 맞춰 활발히 통역아르바이트를 하며 국제감각을 익혔고, 기본적인 영어 문장들을 외우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회사에 들어와서는 야간에 서강대 언론홍보대학원을 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그가 책임자로 있는 호한재단의 업무는 한국과 호주인들 사이에 문화교류를 돕는 것이다. 대사관에서 관련업무를 시작한지 10여년. 당시만 해도 호주하면 ‘캥거루’ 정도 외에는 떠오르는 것이 없다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얼마 전에는 한 언론사의 여론조사 결과 미국을 제치고 ‘가장 가보고 싶은 나라’ 1위에 오르기도 했다.

“호주를 알렸던 것처럼, 때가 되면 한국을 외국인들에게체계적이고세밀하게알리는일을해보고싶어요.”

이씨는 결국 이런 분야에서는 자신이 두드러진 역할을 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종묘에 가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은 무엇인지, 시조를 읽으며 떠올리는 역사적 배경은 무엇인지는 ‘국내파’ 만이 깊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인직기자>cij19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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