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충식/복수와 광기

  • 입력 2001년 9월 12일 18시 25분


‘복수는 꿀보다 달다’고 한 건 호메로스였다. 저 유명한 일리아드에 그렇게 적고 있다. 지구촌 한구석에서 미국 심장부에 복수의 칼을 던진 누군가는 회심의 미소를 지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도 벼른다. ‘개를 죽인다고 물린 자리가 낫는 게 아니다’고 했던 링컨의 충고는 잊어버린 듯하다. 온 미국이 슈퍼파워의 구겨진 자존심을 세우리라고 입술을 깨문다. 전술 핵무기로도 때릴 수 있느냐는 질문에 ‘배제할 수 없다’는 답변이다.

▷복수는 원시이래 연면히 이어져온 ‘피의 도덕’이었다. 영어의 복수 리벤지, 벤전스는 모두 라틴어(vindicare)에서 왔다고 한다. 바른 것을 실증한다는 의미다. 일찍부터 종족에 대한 가해를 막고 핏줄이 살아남기 위해 복수는 불가피했다. 가해자 침략자를 복수하는 것은 핏줄에 대한 도리요, 의무 미덕이었다. 그 복수는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힘의 균형이기도 했다. 누구나가 지닌 자위(自衛)본능의 칼이 벌거벗은 시대 평화를 지켰던 셈이다.

▷중국도 다르지 않았다. 예기(禮記)에서 비롯하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이란 부모 죽인 원수와 하늘을 같이 이고 살 수 없다는 뜻이다. 곧 죽여 복수해야 한다는 의미다. 효(孝) 충(忠) 의(義)를 지키기 위해 부모 군주 친구를 죽인 자는 피로써 갚아야 했다. 피살자의 원한 불명예를 씻는 복수를 게을리하는 것은 살아남은 자의 오욕(汚辱)이었다. 그렇게 가르침으로써 질서를 유지했다.

▷세월이 흘러 공동체가 국가가 되고 다수를 규율하는 법이 생기면서 달라졌다. 국가가 형벌권을 쥐게 되고 개인과 집단의 복수는 금해졌다. 문명의 진보, 이성의 지배에 따른 변화였다. 그러나 21세기 첨단문명 문화의 거리 뉴욕 한복판에 피의 복수극이 펼쳐진다. 최고층 빌딩이 첨단 여객기를 이용한 자살테러로 내려앉는다. 문명의 붕괴, 바로 그것인가. ‘힘의 미국’을 겨냥해 무언가 ‘바른 것을 실증하겠다’는 핏빛 몸부림인가. 아니면 반(反)문명의 광기인가. 이제 미국이 테러를 응징하고 정의를 실증하리라고 울분한다. 벌거벗은 원시를 생각하게 하는 우울한 21세기 아침이다.

<김충식논설위원>seesch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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