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최화경/누명

  • 입력 2001년 8월 27일 18시 31분


▷아내를 죽였다는 누명을 벗기 위해 진범을 찾아 도피행각을 벌이는 한 의사의 이야기를 다룬 1960년대 미국의 TV 인기드라마 ‘도망자’. 국내에서도 방영돼 인기를 끌었던 이 드라마는 실제 인물 샘 셰퍼드를 소재로 했다. 1954년 당시 30세였던 셰퍼드는 자신의 외도사실이 들통나자 아내를 타살한 혐의로 체포됐다. 드라마에서와는 달리 셰퍼드는 도망치지 않았고 유죄판결을 받아 10년을 복역하다 재심에서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그는 알코올중독으로 폐인이 돼 46세의 나이에 세상을 등진다. 그는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나는 아내를 죽이지 않았다”고 되뇌었다고 한다. 누명은 이처럼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간다. 억울한 죄를 뒤집어쓴 채 옥에서 썩어야 하는가 하면 설사 풀려나더라도 망가진 몸과 마음을 추스르지 못한 채 숨어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미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살기엔 너무 늦었기 때문이다.

▷1972년 9월 세상을 들끓게 했던 춘천 파출소장 딸 강간살인사건 범인으로 기소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정진석씨(가명·68). 15년이 넘도록 갇혀 있다 모범수로 출소해 산골에 숨어 살아온 그는 올 3월 “억울해서 눈을 감을 수 없다”며 30년 전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세상으로 나왔다. 이 사건은 현재 서울고법에서 재심개시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아홉살 난 소녀를 성폭행한 뒤 살해한 혐의로 사형이 선고됐던 미국 남자가 17년 만에 무죄로 풀려났다. 그는 석방된 뒤 기자회견에서 “사법체계를 원망하는 일은 오래 전에 포기했다”며 “오판은 내가 용서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35세의 한창 나이에 감옥에 갇혀 매일 밤 사형의 공포에 떨어온 17년이 지워질 수 있을까. 최근 미국의 가톨릭 신부가 진짜 범인의 고백성사를 공개해 억울한 살인범의 누명을 벗겼다는 외신이 가슴에 와 닿는다. 고백성사는 영원히 지켜야 할 비밀이지만 신부는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 계율을 깼다. 누명이란 그만큼 무섭고도 더러운 것이다.

<최화경 논설위원>bb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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