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마당]김현희/한국여성이 잘 나갈려면

  • 입력 2001년 8월 27일 18시 31분


요즘 여성들의 활약이 눈부시다. 세계 정상의 선수들이 겨루는 골프대회에서 선전을 거듭하는 박세리와 김미현, 열악한 조건에서 국제대회 우승을 일궈낸 여성축구대표팀, 세계 음악계에 우뚝 선 조수미와 장한나 등. 마치 ‘여인천하’를 방불케 한다. 왜 한국여성들이 이토록 폭발적이며 눈부신 개가를 올리고 있을까?

인류학자들은 말한다. 개인이든 민족이든 나름대로 고유의 원형(ethos)이 있다고. 그래서 민족의 문화와 역사에는 민족의 원형이 배어 나오며 개인의 행동도 그 나름의 심성과 기질, 즉 원형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소위 ‘여성의 시대’라고 하는 21세기를 맞아 새삼 한국 여성의 원형이 무엇인가 자문하게 된다. 과거에는 신사임당, 심청, 성춘향을 여성의 이상형으로 머리에 각인시켰다. 변변치 못한 남편을 섬기면서 자식을 훌륭히 키워낸 여인, 눈먼 아버지를 위해 바다에 몸을 던진 여인, 기약 없이 떠난 연인을 기다리며 온갖 고난을 버텨낸 여인. 이들에게서 한국 여성들의 원형을 본다.

그러나 ‘현모양처 신사임당’, ‘효녀 심청’, ‘열녀 성춘향’으로서가 아니다. 이들 앞에 붙은 수식어는 가부장 시대의 사회적 배경을 보여줄 뿐이다. 그들에게서는 오히려 ‘끈질긴 인내와 기다림, 그리고 돌파력’이 읽혀진다. 그리고 ‘단호한 결단성’과 ‘폭발적인 추진력’을 공통분모로 추출할 수 있다.

신사임당은 자신을 시대가 받아줄 여력이 없었기에 자식을 훌륭히 키우는 것으로 돌파구를 삼았으며, 심청과 성춘향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향하여 죽음을 감수하며 뒤돌아보지 않고 매진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바쳐야 할 이념과 내용을 선택하여 실천한, 용기 있는 삶을 살았다. 한국 남성들은 그들의 순종, 절개, 효를 칭찬하며 남성 우위의 윤리관을 즐겼을지 모르지만 여성들은 진실에 대한 추구와 인내, 기다림 이후의 결단력과 추진력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배워왔다.

21세기 한국 여성의 앞날은 명암이 엇갈린다. 박세리와 김미현, 여성축구대표팀, 조수미와 장한나처럼 독립된 여성으로서의 원형을 발현한 사례도 있지만 한국 여성의 원형이 사회 전체 발전의 원동력으로 작동하기엔 곳곳에 두터운 벽이 남아 있다.

광복 이후 특히 1980년대 이후 한국 여성의 법적 제도적 위상은 많이 향상됐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여성은 아직도 ‘일차적이기보다는 이차적인’ 또는 ‘본질적이기보다는 부차적인 존재’로 머물고 있다. 여성노동자들은 능력에 관계없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먼저 해고당하거나 비정규직으로 내몰린다. 박사학위를 취득해도 취업을 못한 채 전문지식을 썩힌다.

여성들은 새로운 세계관을 정비할 필요가 있다. 과거 여성은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는 데 있어서 남성이 전제조건 또는 필수조건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여성도 한 인간으로서 독자적으로 우뚝 서야 한다. 여기에 한국 여성의 ‘끈질기고도 억척스러운’ 원형을 병행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될 때 한국 여성은 한 남성, 한 가족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자신과 사회와 세계를 향해 비전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김현희(한신대 교수·사회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