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콘스탄틴 아스몰로프/이념은 가고 국익만 남았다

  • 입력 2001년 8월 6일 18시 19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대통령과 김정일(金正日) 북한 국방위원장의 정상회담 후 발표된 모스크바공동선언에는 앞으로 러-북 관계의 기본성격과 러시아의 대(對)한반도 정책 기조가 잘 드러나 있다.

러시아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외교정책에서 북한의 비중이 크지만 지난 10년 동안 북한이 무시돼 왔다. 러시아는 이번에 ‘북한의 전략적 중요성’을 다시 확인한 것이다. 그러나 공동선언에서 드러난 전략을 실현할 구체적 전술은 앞으로 지켜봐야 한다.

김 위원장의 방러와 러-북 정상회담, 공동선언 발표는 양국관계 회복의 선언적 의미는 갖지만 이번에 논의된 협력 방안이 당장 가시화되기는 힘들다. 따라서 단기적으로 한반도 정세 변화에 급격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판단은 다소 성급하다.

러시아가 추구하는 러-북 관계는 과거 소련과 북한이 맺었던 관계를 복원하자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이념적 동맹’이었지만 지금의 러-북 관계는 ‘전략적 동반자’다. 과거에는 ‘공동의 이념’이 가장 중요했지만 지금은 ‘국익’이 우선이라는 의미다.

예를 들어 공동선언에 군사협력이 언급돼 있지만 실제로 러시아가 북한에 공격용 무기를 팔기는 어려울 것이다. 북한의 지불 능력이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이미 러시아는 대북 무기 판매는 ‘상업적 베이스’에서 이뤄질 것임을 여러 차례 시사했다.

과거 소련도 북한에 대한 공격용 무기 공급에는 신중했다. 자주성이 강한 북한이 독자 행동을 하면 오히려 러시아에 위협이 될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러시아는 근본적으로 한반도의 기존 질서가 급변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남북한의 점진적 관계개선을 지지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번 공동선언문을 분석해 보면 러시아와 북한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먼저 북한은 국제적 고립의 해소를 원하고 있다. 김 위원장이 장기간의 러시아 방문에 나선 것도 그렇지만 공동선언에서 ‘새삼스레’ 유엔의 역할에 대한 존중을 강조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러시아나 북한은 국제무대에서 미국에 대항하는 도구로 중립적인 UN을 활용하고 있다.

‘미군철수’ 언급은 러시아의 속내가 드러난 것이다. 사실 지난번 남북정상회담에서 “한국 통일 후에도 미군주둔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나왔을 때 러시아는 직접적인 표현을 하지 않았지만 상당히 당황했다.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통일한국에 주둔할 미군은 결국 러시아 태평양함대와 극동군을 견제하겠다는 의도가 아닌가. 그러나 이번 공동선언에서 러시아는 북한의 미군철수 주장을 이해한다는 정도의 의사표시만 하고 넘어갔다.

북한 미사일에 대한 언급도 평소 러시아가 갖고 있는 인식의 연장선이다. 한두 개의 북한 미사일이 미국을 심각하게 위협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지만 그것을 핑계로 미사일방어(MD)체제를 구축하겠다는 미국의 독선에 불만을 표시한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북한과의 관계 복원이 한국과의 관계를 해치지 않도록 신경을 쓰고 있으며 러-북 관계 진전이 한국을 위협하지도 않을 것이다. 한국도 “미국의 이익이 반드시 한국의 이익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했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김 위원장의 방러에서 드러난 북한체제의 특징 하나를 지적하고 싶다. 현재 러시아와의 철도 협력 사업은 북한으로서는 가장 중요한 현안이다. 북한은 항상 지도자가 직접 현장을 확인하고 결정해야 하는 체제다. 그런 점에서 김 위원장의 이번 장거리 철도여행은 불가피했던 측면이 있다.

<콘스탄틴 아스몰로프(러시아 극동연구소 선임연구원)>makkawity@ncport.ru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