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역비리 수사 난관]뚜껑 못연 '박노항 리스트'

  • 입력 2001년 4월 26일 18시 33분


박노항 원사가 사용했던 노트북 컴퓨터와 전자수첩
박노항 원사가 사용했던
노트북 컴퓨터와 전자수첩
병무비리의 핵심 고리인 박노항(朴魯恒·50) 원사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면서 관심은 사회 유력층 인사가 얼마나 연루됐는지에 모아지고 있다. 그러나 수사 초기부터 박씨의 혐의가 ‘과대 포장’됐다거나, 수사가 장기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박노항 리스트’ 발견될까〓군 검찰은 25일 박씨의 은신처에서 압수한 노트북컴퓨터와 일제 전자수첩에서 수사의 단서를 찾길 기대하고 있다. 박씨가 입을 열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그에게 병역 청탁을 알선했거나 그의 도피를 도운 인물 등의 명단이 담겨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트북에서는 박씨가 재직 때 입력했던 제목뿐인 수사보고서만 발견됐다. 전자수첩도 장기간 사용하지 않은채 방치하는 바람에 배터리가 방전돼 내용이 모두 지워진 상태다.

군 검찰은 이에 따라 전자수첩의 ‘기록’ 복원에 주력하고 있다. 배터리 방전으로 명단이 지워진 전자수첩에는 유일하게 박씨가 투자했던 모 환경폐기물 업체 사장(여)의 이름과 연락처만 남아 있었다. 이는 박씨가 이 업체에 6000만원을 투자했다가 4500만원을 회수하고 나머지 1500만원을 돌려 받을 목적으로 남겨둔 것으로 확인됐다.

서영득(徐泳得) 국방부 검찰단장은 “어제(25일) 용산전자상가의 전문가 5인에게 복원을 의뢰했으나 ‘전자수첩이 97년 이전에 만들어져 국내에선 복원이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군 검찰은 이 전자수첩을 일본의 제조회사로 보내 지워진 내용을 복원할 방침이다.

따라서 앞으로 컴퓨터나 전자수첩에서 어떤 내용이 나오느냐에 따라 수사 진행 속도나 폭이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수사가 난관에 부닥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컴퓨터와 전자수첩이 복구되지 않거나 그 안에 담긴 내용이 병역비리와 전혀 무관한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어’를 낚을 수 있을까〓서 검찰단장은 26일 브리핑에서 “박씨의 전체 수뢰액 규모가 100억원대에 이른다는 일부 언론의 보도는 과장된 것”이라며 “병역비리는 대체로 몇 천만원에 불과하고, 군 관련은 몇백만원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해 ‘예단’을 경계했다. 박씨가 검거됐지만 정관계 등 사회지도층의 병무비리를 파헤칠 정도의 ‘물건’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 미지수라는 것이다.

검찰 내에서도 언론이 기대하는 것만큼 거물급 정치인이나 고위공직자 연루사실이 밝혀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세칭 ‘졸부’들 정도가 추가로 확인되는 선에서 수사가 이뤄지지 않겠느냐는 얘기다.

한 검찰관계자는 “이른바 ‘높은 사람’들이 병역 청탁을 했다면 박씨가 아니라 군 장성이나 통합병원장 등 그 계통의 거물들에게 했을 것”이라며 “박씨의 군내 거래 대상도 위관급 군의관이나 일부 영관급 정도”라고 말했다.

병무비리 수사의 단서를 제공했던 반부패시민연대가 지난해 2월 검찰에 제출한 의혹자 명단에는 정치인과 재계 인사를 포함해 120명의 이름이 들어 있지만, 이들이 박씨와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또 뇌물사건의 속성상 주고받은 사람들이 서로 입을 다물면 물증을 찾아내기 어렵다는 것도 어려움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이 때문에 이번 수사는 5, 6개월이 걸리는 장기전이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박씨가 개입된 것으로 알려진 병무비리가 100여건에 이를 정도로 방대해, 경우에 따라선 참고인만도 수백명에 이를 수 있다. 이른바 ‘비호 세력’을 밝히는 문제도 3년에 걸친 그의 도피행적이 제대로 규명되어야 하기 때문에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하태원·이명건기자>scooo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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