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대중가요, 방송 한 번 타기 힘드네

  • 입력 2001년 3월 22일 11시 34분


<음반 사전검열 폐지됐지만 방송사들 엄격한 자체 심의… 조금만 거슬려도 ‘방송 불가’>

창문을 열고 내다봐요/ 저 높은 곳에 우뚝 걸린 깃발 펄럭이며/ 당신의 텅 빈 가슴으로 불어오는/ 더운 열기의 세찬 바람…’ 가수 정태춘의 노래 ‘시인의 마을’은 발표 당시 공연윤리위원회 심의에서 ‘대중가요 가사로는 방황, 불건전한 요소가 짙어 부적절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공륜은 ‘텅 빈 가슴으로’를 ‘부푼 가슴으로’, ‘더운 열기의 세찬 바람’을 ‘맑은 한 줄기 산들바람’으로 고치라는 지시를 내렸다. 지금 보면 참 어이없는 일이다.

정태춘의 헌법소원으로 96년 6월 음반에 대한 사전심의가 폐지됐을 때 가요계 관계자들은 만세를 불렀을 것이다. ‘이젠 모든 창작과 표현의 자유가 무한대로 보장되고 간섭이나 검열은 없어지는구나.’ 그러나 심의가 철폐된 이후 얼마나 다양한 가요가 나왔으며, 창작자의 자유롭고 창조적인 표현이 보장되고 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음반사전검열이 폐지되면서 이제 가수가 노래를 발표하는 일은 예전에 비해 훨씬 자유로워졌다. 그러나 공중파 방송 3사는 나름대로 기준을 정해 심의를 거쳐 방송에 내보낼 노래와 그렇지 않은 노래를 선별한다. 이른바 ‘방송 부적격’ 판정을 받는 노래들은 폭력을 조장하거나 저속하고 음란한 가사, 간접광고 등의 혐의가 있는 노래들이다. 대중문화에 있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방송의 힘을 고려할 때, 방송을 타지 못하는 노래는 거의가 사장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방송 부적격’이란 딱지는 가수의 활동과 음반 판매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친다.

방송사별 기준도 들쑥날쑥

최근 DJ 한용진씨가 발표한 ‘대한민국 싸이코’라는 음반은 이렇게 방송 심의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아 앨범을 구매하지 않은 일반인들이 들을 수 없었던 노래들만을 모은 것.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는 ‘삐딱한’ 가수들의 노래가 대부분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유승준-핑클-COOL-박지윤 등 인기가수들의 곡도 함께 실려 있다. 유승준의 ‘Throw Your Hand Up’과 핑클의 ‘나만의 비밀’은 ‘특정상표로 인한 간접광고’ 때문에, 구피의 ‘판도라’는 ‘남녀관계를 연상시켜서’, 박지윤의 ‘LOVE SIGNAL’은 ‘선정적인 가사’ 때문에 심의를 통과하지 못했다.

‘머더 퍽커스’와 같은 영어 욕으로 시작해 ‘×발아 ×까라 집어쳐라 닥쳐라 ×바리 집어쳐라’ 등 상스러운 욕설로 가득한 DJ DOC의 ‘LIE’나 ‘냄비들 따먹고 안 만나도 양아치고/ 술 먹고 웨이터한테 가리해도 양아치고’(옵션의 ‘양아치’) 같은 노래가 보수적인 방송 심의를 통과하지 못한 것은 이해가 된다 하더라도 몇몇 노래의 불가 판정은 지나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 여자가 쓰러지고 있다/ 비참하게 무너지는 꼴을 봐라/ 누가 O양에게 돌을 던지랴’(치킨헤드의 ‘누가 O양에게 돌을 던지랴’) ‘어렸을 때 공산당은 빨갱이/ 그러나 지금은 우리와 같은 한 핏줄 한 동포/ 예전엔 이런 말 하면 잡혀갔네’(피플크루 ‘이제는 하나’) 같은 노래에 붙어 있는 ‘저속한 가사’ ‘염세적 내용’의 불가 이유는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각 방송사에서 운영하고 있는 가요심의위원회는 자체적으로 정한 심의기준에 따라 음반으로 출시된 모든 가요에 대해 방송적부 판정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심의기준이라는 것이 방송사마다 차이가 있다. 그러다 보니 KBS에서는 부적격 판정을 받은 곡이 MBC나 SBS에서는 통과가 되어 방송에 나오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KBS는 공영방송이라는 특성상, 타 방송사에 비해 심의기준 강도가 높은 편. 최근에 나온 ‘지누션’ 3집 앨범의 경우 KBS는 ‘빙빙빙’ 한 곡을 제외한 전 곡에 대해 방송불가 판정을 내렸다. 심의실측은 “대부분의 노래가 인종차별적인 용어를 쓰는 등 청소년의 정서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이유를 밝혔다.

지누션 매니저 안덕근씨는 “직설적인 노래말이 있어 부분적으로 불가 판정을 받을 것이라는 예상은 했지만 한 곡을 제외한 전 곡에 대해 이같은 조치를 내린 것은 납득할 수 없다. 심의에 통과하려면 노래말을 바꿔야 하는데, 2년간의 작업 끝에 시장에 나온 음반을 전면적으로 수정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고 항변했다. 또한 “힙합의 기본정신은 자유로움에 있다. 힙합음악에 으레 쓰이는 의성어와 표현을 하나하나 문제삼는 건 장르와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발상이다”라고 덧붙인다.

‘싸이’ 노래는 절반 이상 불가판정

가수들의 불만만큼이나 방송사 심의실의 고민도 크다. KBS 심의실의 강성범 부주간은 “심의위원에 현역 PD들을 영입해 현재의 트렌드와 방송실무자들의 견해를 적극 수용하고 있다. 또한 음반`-`영상 제작사에 심의기준 및 지적사례를 알리는 공문을 발송해 오해나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하고 있다”고 밝혔다. 강부주간은 “창작자의 예술성과 자율성을 존중하려고 하지만 방송이라는 특성상 규제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둘 사이의 적정선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고충을 털어놓는다.

남녀간의 성관계를 떠올리게 하는 ‘널 갖고 싶어’ 같은 표현도 이제는 너무 흔해서 그 자체로는 판정이 어렵다. 심의실의 자료를 보면 이런 표현이 들어가더라도 전체 분위기가 건전하고 밝은 편이면 통과가 되고, 앞에 ‘오늘 밤’ 같은 표현이 들어가면 ‘부적격’이 되기도 한다.

최근 ‘새’라는 노래로 가요계에 신선한 충격을 선사하고 있는 신인가수 ‘싸이’(본명 박재상)는 앨범에 수록된 20곡 중 16곡(KBS), 13곡(MBC, SBS)이 무더기로 방송불가 판정을 받았다. 엽기적이고 지나친 성적 표현이 문제가 됐다. 타이틀곡 ‘새’의 ‘나 완전히 새 됐어’ 라는 가사를 놓고도 심의실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신세대들이 황당하거나 민망할 때 쓰는 ‘새 됐다’는 표현을 나이 드신(?) 심의위원들이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노래 제목 중에는 ‘I Love Sex’ 같은 것도 있다.

“위선과 가식을 벗어 던지고 싶은 솔직한 심정을 표현한 노래들이다. 노래 제목이나 내용을 바꿀 생각은 없다. 심의에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물론 방송용으로 ‘얌전한’ 노래도 만들 생각이지만, 2집은 더 직설적인 내용으로 꾸밀 생각이다”고 말하는 싸이는 “그냥 내놔도, 나쁜 건 사회에서 다 걸러지게 마련 아닌가. 소수의 사람들이 좋은 음악과 나쁜 음악을 판단한다는 건 옳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싸이의 말처럼, 앞으로도 많은 가수들이 계속해서 ‘불경한’ 노래를 만들 것이고 방송사는 이들에게 ‘방송불가’라는 철퇴를 가할 것이다. 가수나 제작자는 보다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통합규정을 만들 것을 촉구하고 있지만, 방송위원회가 각 방송사로 권한을 넘겨 자율적으로 심의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만큼 이도 간단치 않다. 음악평론가 송기철씨는 심의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동시대의 정서를 이해하는 감각이 필요하고 창작자들 역시 수준 있는 음악을 만들겠다는 양심과 책임의식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 신을진 기자 happyend@donga.com >

방송 부적격 노래만 골라 ‘대한민국 싸이코’ 낸 DJ 한용진씨

“심의 예전보다 강화… 판단은 대중이 할 일”

‘대한민국 싸이코’라는 음반이 나왔을 때, 전국의 음반도매상과 소매상에서 항의가 빗발쳤다. 무엇보다 앨범 재킷이 문제였다. 여자의 나체, 그 중에서도 가슴 부분을 클로즈업한 사진은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들을 모두 민망하게 했다. 거기다 ‘19세 미만 청취 불가’라는 빨간 딱지까지 붙어 있어 적잖이 화제가 됐다. 결국 재킷 사진을 바꾸는 소동이 벌어졌다.

“주고객 층인 10대를 포기했지만 색다른 음악을 찾는 팬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말하는 한용진씨는 “가수의 개성이 살아 있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방송을 타지 못한 곡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고 제작 동기를 밝혔다.

30년 가까이 다운타운 가에서 활동해온 DJ 한용진씨는 그 전에도 수많은 리믹스 앨범(본인은 ‘재활용 음악’이라고 말한다)과 판소리에 댄스곡의 색채를 입힌 ‘랩창’ 음반을 발표해 가요계의 주목을 받았다. 늘 새로운 것, 남이 하지 않는 것을 찾아다니는 그에게 ‘방송부적격’ 음악도 큰 관심거리였다.

“랩창 앨범에 ‘흥부가’로 만든 곡이 있었는데, ‘놀부가 앉은뱅이를 꿇어앉히고…’하는 대목이 장애인에게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방송부적격 판정을 받았어요. 정말 웃기지도 않는 일이죠.”

한씨는 가요에 대한 심의가 오히려 예전보다 더 강화되었다고 말한다. 방송에서 단어 하나, 복장 하나까지 규제하다 보니 오히려 더 멋대로, 선정적으로 가는 부작용을 낳는다는 것. 같은 욕이라도 일상에서 쓰는 것과 음악에 사용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표현이 좀 거칠어도 시대를 대변하고, 우리의 속을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노래들이 있습니다. 판단은 그 노래를 듣는 대중이 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이번 음반이 애매모호하고 작위적인 방송의 심의기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간동아 2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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