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마키아벨리의 가면

  • 입력 2001년 2월 23일 18시 52분


◇군주론에 숨겨진 마르크스주의/루이 알튀세르 지음/오덕근·김정한 옮김/240쪽, 1만2000원/이후

인상파 화가들이 헤겔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알면 고개를 갸우뚱거릴 사람이 많을 것이다. 놀랍게도 인상주의자들이 1878년 당시 신문에 기고한 내용을 보면 스스로 헤겔의 제자임을 자처하고 있다.

헤겔은 예술이란 단순히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고 그 속에 정신을 담아서 현실을 재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상파 화가들은 이렇게 재창조된 현실이란 화가의 즉각적 감각(인상)에 의해 재창조된 현실이라고 말한다.

헤겔이 말하는 정신은 원래 이성과 동일한 개념인데 그들은 그것과 가장 거리가 먼 즉각적 감각을 정신이라고 이해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오해는 서양 회화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는 획기적인 창조로 이어졌다.

이 책의 저자 알튀세르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다. 특히 서구 지성계에서 마르크스가 ‘죽은 개’로 전락했을 때도 마르크스를 버리지 않았던 최후의 마르크스주의자였기 때문에 우리 진보 학계에 끼친 영향도 크다.

심지어 마르크스에 대한 강한 집착과 교조적인 해석 탓에 그는 이론적인 면에서 스탈린주의자로 취급받기도 했다. 이런 그가 마키아벨리에 관해 저술을 했다면 독자들이 갖는 생각은 뻔하다. 당연히 마키아벨리를 마르크스주의의 시각으로 비판했겠지 하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 책은 이런 예상을 완전히 빗겨난다. 알튀세르 자신이 술회하고 있듯이 마키아벨리의 의식이라는 가면 속에서,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 자신에 관한 것이다. 이 책에서 마키아벨리와 마르크스주의자인 그의 목소리가 일치하고 그렇게 해서 마키아벨리 또한 마르크스주의자가 된다.

알튀세르는 이 책 이전에도 다른 사상가들을 마르크스주의자로 둔갑시키는 탁월한 재주를 보여줬다. 그의 자본론 독해는 구조적 인과성이라는 스피노자식의 사고에 의존하며, 그의 독창적인 이데올로기론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응용한 것이다. 여기서도 그는 다른 사상가들의 텍스트를 자신의 목소리로 완전히 탈바꿈시키는 독창성의 대가임을 증명했다.

마키아벨리에 대한 그의 해석도 기존의 해석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는 마키아벨리를 ‘정치학자’ 내지 ‘근대 정치학의 창시자’로 보는 정통적인 해석 방식을 거부한다. 또한 통치자를 속이기 위해 군주주의자처럼 행세하지만 오히려 군주주의의 본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공화주의를 설파하는 인민주의자라는 루소의 해석도 거부한다.

그에게 마키아벨리는 철학자이다. 현실 정치는 간계와 술책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장이다. 그렇게 펼쳐진 이데올로기의 장은 매순간의 정세로 나타난다. 정세란 어떤 필연성이 실현되어서 나타난 순간이 아니라 필연과 우연, 구조와 모순이 중첩되는 우발적인 시공간이다. 여기서 단순한 목적론이나 역사 유물론을 청산하고 마키아벨리적 시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정립하려는 그의 의도가 잘 드러난다.

어쨌든 이 책은 기존의 텍스트에 대한 경직성을 일깨우고 사고의 독창성이 얼마나 굉장한 것인가를 느낄 수 있는 기쁨을 준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독창성으로 인해 우리가 알고 있던 마지막 마르크스주의자의 실체가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씁쓸함도 느끼게 한다.

박영옥(철학박사·고려대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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