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와 사람들]야구역사를 쓰는 기록원들

  • 입력 2001년 1월 26일 16시 27분


지난 1999년 10월 18일 열렸던 뉴욕 메츠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의 챔피언결정 5차전.

뉴욕 메츠의 로빈 벤추라는 3-3이던 연장 15회말 1사 만루상황에서 나와 끝내기 홈런을 날렸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스코어는 7-3이 아니라 4-3으로 기록, 발표됐다.

이는 벤추라가 그라운드로 뛰어나온 동료들과 얼싸안고 기쁨에 겨워한 나머지 2루를 미처 밟지 못했기 때문. 내셔널리그의 공식기록원은 '타자가 1루에서 멎으면 단타로 처리한다'는 경기규칙 조항을 적용해 단타처리를 했다.

결국 벤추라는 너무 감격에 겨워한 나머지 만루홈런을 도둑맞은 셈이 됐다.

▼선수들 강한 불만표시 하기도▼

국내 프로야구에서도 선수들이 기록원들에게 항의하는 모습을 종종 볼수 있다.

지난해 9월 1일 사직구장에서 벌어진 롯데와 LG와의 더블헤더 2차전.

1회 선두타자로 나온 김응국은 LG선발 김민기의 4구째를 받아쳐 중견수 쪽으로 빠지는 안타성 타구를 날렸지만, LG 유격수 유지현의 호수비에 걸려 1루에서 아슬아슬 하게 살았다.

공식기록은 LG 유격수 유지현의 에러. 박정태의 좌전안타로 홈을 밟은 김응국은 곧바로 기록원석으로 뛰어가 헬멧을 집어던지며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기록원들은 늘상 안타인지 실책인지 순간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선수들의 기록 하나하나가 다음해 연봉으로 직결되기 때문에 선수들과의 마찰도 생기기 마련.

기록원의 생명은 공정성과 냉정함이다. 애매한 상황이 수시로 발생하기 쉬운 야구의 속성상, 기록원들의 말 한마디가 경기의 흐름을 바꿔 놓을수도 있다.

기록원들이 하는 대표적인 일은 ▲투수의 경우 승리투수, 세이브 투수를 결정하고 ▲타자의 경우는 안타, 도루, 실책 여부 등 모든 세부사항들을 결정하는 것이다. 공식기록지도 이들의 손을 통해 작성된다.

▼KBO 공식기록원은 모두 12명▼

한국야구위원회(KBO)의 제1호 기록원은 김학효씨. 지난 82년 3월27일 벌어진 프로야구 개막전부터 98년 한국시리즈 6차전까지

17년동안 1691경기의 기록을 도맡았다.

기록원이란 직업에 대해 그는 '야구의 역사를 정리하는 사관'이라고 규정한다. "기록이란게 단순히 경기를 옮기는 게 아니라, 순간순간 일어나는 일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이라며 "야구 전반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82년 프로야구 개막당시 기록원은 3명이었다. 20년이 흐른 지금 KBO의 공식 기록원은 모두 12명.

그래도 기록원들의 일정은 빡빡하다. 1군 경기에 2명씩, 그리고 2군 경기에 한 명씩 투입되고 나면 여유 인원 하나 없다.

선수가 1년에 133경기를 뛰는 동안 기록원들은 140경기 이상을 소화해야 한다. 기록원들은 생활 패턴은 선수들과 비슷하다. 시즌 중 집에서 머물수 있는 기간은 채 절반이 안된다.

▼정보전의 첩병 구단 기록원▼

KBO의 공식기록원 이외에 각 구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기록원들도 있다. 이들은 정보전의 첨병 역할을 수행한다.

일본의 경우 원정 기록원이 팀당 많게는 5, 6명씩 일하고 있는데, 이들은 상대 팀의 전력 분석뿐 아니라 세세한 투구폼의 차이까지 집어낼 정도다.

선동렬 KBO홍보위원이 올시즌 일본으로 진출한 구대성에게 "일본의 기록원들은 세세한 투구폼의 차이까지 집어낸다. 무엇보다 잘못된 투구버릇을 고쳐야 한다"고 충고했을 정도다.

기록원들의 업무는 음지에서 이뤄진다. 들이는 노력에 비해 빛을 보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야구팬들은 선수, 감독의 몸짓 하나하나에 열광하지만 야구장 한켠에 조용히 앉아 기록지를 작성하고 있는 이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이 없으면 한국 프로야구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 이들의 판정하나로 대기록이 탄생할 수도, 그대로 묻혀 버릴수도 있다.

오늘도 기록원들은 "내 기록이 곧 한국 프로야구의 역사"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며 야구장의 한켠을 묵묵히 지키고 있다.

최용석/동아닷컴 기자 duck8@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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