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충식/필리핀 혁명과 '지프니'

  • 입력 2001년 1월 21일 16시 25분


필리핀의 두 번째 시민혁명을 지켜보면서 마닐라 거리의 지프니 차를 떠올린다. 택시와 마을버스를 합쳐놓은 것과 같은 15인승 정도의 교통수단이다. 미군 지프를 개조해 쓰다가 근래에는 일본의 중고차를 고쳐 사용한다. 마닐라 시내는 이 지프니망으로 촘촘히 엮여 있다. 관광객도 알고 타면 싸고 편리한 ‘서민의 발’이다. 그러나 말이 15인승 규모라는 것이지 따로 정원도 없다. 그래서 손님이 많으면 차체에 매단 채 달린다.

▷지프니는 알록달록 요란한 원색 치장에 더러 성모 초상, 비키니 여성 사진, ‘아이 러브 필리핀!’ 같은 스티커도 달고 달린다. 역사의 굴절과 뒤섞인 문화를 상징하는 것 같다. 성모상은 16세기 마젤란의 상륙 이후 스페인 지배에 따른 가톨릭 문화의 그림자일 것이다. 비키니 사진은 미국이 스페인과의 전쟁(1898년)에서 이겨 필리핀을 ‘따낸’ 이후 스며든 양키문화로 비쳐진다. 그리고 차체의 ‘도요타’ 상표는 일제의 점령을….

▷지프니에는 조수가 없다. 만원이 되면 승객끼리 돈을 차례로 ‘전달’해서 운전사의 손에 건넨다. 내릴 때는 소리도 치지만, 대개 차의 천장을 쿵쿵 두드려 신호를 보낸다. 기본요금이 있고 거리가 멀어지면 좀 더 내야 한다. 그래서 요금을 나중에 내면 운전사가 어디서 탔느냐고 묻게 되므로, 아예 먼저 지불하는 편이 낫다고 ‘관광안내서’는 권한다. 때로는 반군의 인질 소동, 빈부격차 등으로 어수선하고 무질서한 필리핀의 이미지가 지프니와 오버랩되기도 한다.

▷그래도 지프니는 노선이 있다. 차의 앞 유리창과 차체에 코스가 적혀 있다. 다만 타고 내리는 것은 자유다. 손들어 타기도 하고 남이 탈 때 달라붙기도 한다. 그런 식으로 필리핀인들은 사고 없이 편리함을 공유하는 것이다. 마르코스 독재를 내쫓은 무혈혁명 이래, 다시 부패 스캔들에 휘말린 에스트라다 대통령도 축출되었다. 민주주의와 반(反)부패 빈부격차 해소라는 확실한 ‘노선’이 지프니의 행선지처럼 굳게 지켜지고 있는 것인가. 비록 남의 눈에 어지럽고 조금은 어수선하게 보이더라도.

<김충식논설위원>seesch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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