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제일은행 해외매각1년 무엇을 남겼나

  • 입력 2001년 1월 16일 18시 31분


새해 벽두 제일은행에서는 ‘깜짝 인사’가 단행됐다.

부장으로 승진한 지 11개월밖에 안된 최원규(崔元圭·47)부장이 업무 및 어학능력을 인정받아 소비자금융 담당 상무로 발탁된 것. 입행 동기들이 이제야 지점장으로 나가는 것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 그러나 능력위주 인사관행이 굳어진 행내에서는 자연스러웠다.

그 다음날인 1월5일. 새벽부터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이사진에 긴급 연락이 갔다. 콘퍼런스콜(전화회의)을 열어 산업은행의 회사채 긴급 인수제도의 협조 여부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정부 방침에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14명의 이사진 중 10명이 외국금융기관에서 활동중인 금융전문가로 시장논리와 동떨어진 방침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 그 결과 며칠 동안 정부와 제일은행간 밀고 당기는 신경전이 불가피했다.

21일은 제일은행이 미국의 뉴브리지캐피털에 매각돼 윌프레드 호리에 행장이 취임한 지 1년이 되는 날. 지난해 내내 ‘은행권의 고도(孤島)’로 불리며 이질적인 존재로 비쳐졌던 제일은행은 금융가에 ‘혁명가’ 논란을 일으킬 정도의 파격적인 행보로 2001년을 맞고 있다.

그러나 제일은행의 해외매각으로 선진금융기법이 도입되고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 의견이 분분하다.

▽달라진 지배구조와 조직문화〓지난해 상반기에만 해도 제일은행 행원들의 최대 스트레스는 영어구사능력과 업무 영역별 전문성이었다. 기업대출전문가(RM) 부동산대출자문역(MFA) 대출전문심사역(CLS) 등 업무별 전문가들을 사내 공모로 뽑는 과정에서 경쟁률이 10 대 1에 가까워 행원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업무가 끝나면 학원을 전전해야 했다.

삼성증권의 한 은행애널리스트는 “회의를 영어로 진행하는 등 기존 행원들이 상당한 ‘문화충격’을 겪었으며 일부에선 ‘잘되나 보자’는 내부 분위기도 있었다”며 “그러나 행장이 모두 다독거려 지금은 ‘한 번 해보자’는 분위기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제일은행은 또 이사회 운영 등 지배구조 측면에서 상당히 앞서 있다.

금융연구원의 지동현 선임연구위원은 “제일은행의 이사회는 뉴브리지캐피털 인사가 3명으로 대주주가 직접 주요 의사결정에 참여하면서 감시자로서의 역할을 한다”며 “사외이사의 대부분인 교수나 학자 출신인 국내 은행과 비교해 사외이사의 전문성도 높다”고 말했다.

▽선진금융기법의 전파에 기여했나〓전문가들은 제일은행의 1년간의 성과로 정부로부터 자율적인 은행 경영의 씨앗을 뿌렸다는 점과 수익성 위주의 경영을 든다.

제일은행 김진관 비서팀장은 “은행장 회의 등이 열려도 우리 은행에 해당되지 않는 안건을 논의한다든지 또는 반대할 회의에는 가급적 참석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소액계좌 수수료 부과와 철저한 기업대출 심사제도 등은 수익성 경영의 대표적인 사례.

그러나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이것만 갖고 제일은행이 선진금융기법의 전도사 역할을 했는지는 단언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한국은행에서 제일은행을 담당하는 진우생 조사역은 “제일은행의 9월 말 경영지표는 99년 말에 비해 월등히 좋아졌지만 정부가 부실채권을 매입해 주면서 추가로 3조5000억원 가량의 공적자금을 투입한 영향이 크다”고 말했다.

따라서 제일은행의 수익성 경영이 검증을 받으려면 정부의 부실채권 매입이 끝나는 2002년이 지나야 한다는 것.

또 제일은행이 기업대출을 줄이면서 소매금융에 주력하는 것에 대해서도 시각이 곱지 않다.

한빛은행 관계자는 “정말 선진금융기법이 필요한 곳은 기업금융 분야이며 ‘땅 짚고 헤엄치기 식’의 소매금융에 몰두하는 것이 과연 선진금융기법인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박현진기자>witness@donga.com

▼호리에 행장 "제일은행 변화 시간갖고 지켜봐 달라"▼

제일은행 윌프레드 호리에 행장(55·사진)은 은행가치를 더 높인 다음 4년쯤 뒤에나 기업공개를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호리에 행장은 제일은행 해외매각 1주년을 맞아 서울 종로구 공평동 제일은행 본점 행장실에서 인터뷰를 갖고 이같이 밝혔다. 미국과 일본에서 금융전문가로 활약한 호리에 행장은 ‘해외매각 이후 그다지 달라진 점이 보이지 않는다’는 질문에 “좀더 시간을 갖고 지켜봐달라”고 대답했다. 다음은 호리에 행장과의 일문일답.

―지난 1년간 한국금융을 지켜본 솔직한 심정은….

“제일은행을 포함해 과거 한국의 은행들은 정부정책을 뒷받침하고 대기업에 돈을 대주는 역할을 담당해왔다. 특히 대기업에 지나치게 여신이 집중돼 있는데 아직도 국내 대기업들의 구조조정 노력이 부족하다. 은행여신이 먼저냐, 기업 구조조정이 먼저냐를 따져보면 당연히 기업 구조조정이 선행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신관리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여신부문은 가장 먼저 재구축한 분야다. 아직도 많은 국내 은행들이 사업개발 기능과 여신결정 기능을 같이 묶어두고 있다. 사업개발과 여신결정은 완전 분리돼야 한다. 여신결정 담당자가 아무리 유능하더라도 분리가 안되면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합리적인 신용평가시스템도 도입했다.”

―대기업 금융을 축소하고 소비자 및 중소기업 금융 비중을 높여나갈 것인가.

“다소 오해가 있는 것 같다. 현재 대기업에 5조원 가량의 여신이 있다. 여신총규모는 그대로 유지하되 기업별 배합을 바꿀 것이다. 성장가능성이 큰 소비자 및 중소기업 금융을 집중 개발해 전체 여신에서 대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을 현행 50%에서 20%대로 낮춰 나가겠다.”

호리에 행장은 소액계좌수수료부과 등 최근 일련의 고객차별화 정책과 관련, “레스토랑에 찾아와 물만 마시고 가는 손님과 식사를 주문하는 손님을 똑같이 대우해서야 되겠느냐”고 반문했다.

<성동기기자>espr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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