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신인석/회사채 인수 시장에 맡겨라

  • 입력 2001년 1월 15일 18시 40분


회사채 신속 인수제도가 쟁점이다. 시장 실패가 존재하는지, 시장 실패가 있다면 시행 정책이 적절한 대응 방안인지 등이 논란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시장 실패의 개연성은 있으나 현재의 정책은 개선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정부 역할은 '저축자'로만▼

먼저 시장 실패의 존재와 관련해서는 회사채 시장 현황이 ‘정크본드 시장이 부재한 가운데 정크본드가 대량 존재한다’는 사실로 요약됨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정크본드가 발행된 예가 없다. 발행된 적이 없는 정크본드가 오늘날 대량 실재하는 이유는 99년 중반 대우 부도에 따른 여건 변화에 있다. 대우 부도로 재벌 불사의 프리미엄이 사라지고 신용 위험에 대한 인식이 환기되자 정크들이 실체를 드러냈고 이들이 98년 대량 발행한 회사채가 사후적으로 정크본드로 됐던 것이다.

그러면 시장은 이제라도 가격 기능에 의해 정크본드 시장을 만들어 낼 것인가? 효율적 시장 가설을 신봉하는 사람이라면 긍정적으로 답할 것이고 시장 실패의 가능성을 배제할 것이다. 주가와 회사채 가격은 효율적 시장에서 기업의 내재가치를 반영해 결정되는 바 정크본드라 하더라도 금리가 적절히 조절되면 소화되지 못할 이유가 없고, 만일 발행에 실패한다면 이는 해당 기업이 구조조정돼야 함을 의미할 뿐이라는 주장이 뒤따를 것이다.

그러나 90년대 미국 하버드대 실라이퍼 교수 등을 중심으로 등장한 ‘행태 금융경제학’에 영향받은 학자라면 달리 답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이들은 투자자들의 경험적 행태를 근거로 한 이론 전개를 선호한다. 따라서 이들은 장기투자, 분산투자가 정크본드 투자의 기본이라는 점, 그래서 선진국의 경험에 의하면 보험 연금펀드 등이 주요 투자자라는 점을 지적할 것이다. 또한 단기투자에 익숙하고 위험 부담에 낯선 우리나라 저축자를 기반으로 이같은 성향의 펀드가 당장 형성되는 것은 무리이며, 그러므로 현재 존재하는 정크본드들은 시장 부재로 차환에 어려움을 겪을 개연성이 있다고 예견할 것이다. 일리 있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시장 실패의 개연성을 인정할 때 바람직한 정책 대응은 무엇일까? 저축자의 행태가 쉽사리 변화하지 않아 발생하는 문제이므로 대안은 정부가 모자라는 저축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즉 정부가 국채 발행으로 자금을 마련해 투신사에 장기 저축한 뒤, 투신사로 하여금 다양한 등급의 회사채에 투자하는 펀드를 자율적으로 운영토록 하는 것이다. 이때 과연 시장 실패의 징후가 있는지는 국채와 최저투자등급 회사채의 금리차가 과도하게(예컨대 2배 이상) 벌어지는지 등으로 판단하면 될 것이다. 이 정책은 정부 역할이 회사채 시장에 대한 유동성의 공급자, 즉 저축자에 국한되며 나머지 의사 결정은 전적으로 시장 자율이라는 점에서 현재의 회사채 신속 인수제도와 다르다. 또한 원하지 않는 은행으로 하여금 투신사에 강제 저축토록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존의 담보부채권(CBO)펀드정책과도 구별된다.

▼은행주도 구조조정 이상적▼

이 같은 장기 정크본드 투자펀드의 설정에도 불구하고 차환발행에 실패하는 기업은 있을 것이고 또한 당연히 있어야 한다. 특히 워낙 대량의 만기물량을 갖고 있고 경영진의 신인도도 낮은 대기업은 문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 제대로 된 금융시장이라면 이 대목이 은행의 역할이 기대되는 부분이다. 즉 주거래 은행이 채권자로서 주도권을 행사하고 구조조정 계획을 기안하고 추진한다면 이상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또 하나의 시장 실패이든 정치적 이유에 의한 시장 왜곡이든, 대기업에 관한 한 은행에 그런 기능이 없음은 우리 금융시장의 불행한 현실이다. 정책 당국이 직접 나서야 할 과제는 바로 이것이다. 즉 산업은행과 같은 공적 기관의 역할은 시장이 하지 못하는 대기업 구조조정에 중점을 둬 설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일반적으로 시장 실패의 판단은 어렵고 대응 정책의 디자인은 더욱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금융기관의 강제 참여 배제, 구조조정 추진 등은 꼭 지켜져야 할 원칙이다. 시장 실패의 개연성에 찬동하는 경제학자가 어느 정도일지는 몰라도 무원칙한 개입이라면 시장 실패의 감수를 택할 이가 대부분일 것이기 때문이다.

신인석(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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