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동아꿈나무재단 장학금기탁 독지가 2인

  • 입력 2000년 12월 14일 18시 42분


11일 오후 3시경 동아일보사 서울 충정로사옥에 있는 동아꿈나무재단 사무실에 회색 잠바를 입은 80세 노인이 찾아왔다.

160여cm의 비교적 작은 키에 흰색 운동화를 신은 그는 그저 평범한 동네 할아버지 같았다. 얼굴의 짙은 주름과 얇아진 입술, 앞니 빠진 잇몸 등은 한눈에도 그가 고생을 많이 한 노인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했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잠바 안주머니에서 1000만원짜리 수표 5장을 꺼내놓았다.

“죽은 제 아내 이름으로 동아일보의 장학재단인 동아꿈나무재단에 기부하고 싶습니다. 소년소녀 가장에게 장학금을 나눠주십시오.” 이 한마디만 남긴 채 그는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는 서류작성을 위해 K라는 이니셜로 표기할 수 있는 이름을 남기기는 했지만 익명으로 해줄 것을 간곡히 당부했다. 심지어 기부자로 되어있는 아내의 이름마저도 신문에는 밝히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아내의 이름이 공개되면 결국 자신의 이름도 공개될 수밖에 없어 익명으로 하고 싶은 뜻이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서류에 이름 쓰는 것도 거북해하시는 이런 분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 남아있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지더군요.” 이 노인을 직접 만난 동아꿈나무재단 최준철(崔俊喆)이사의 말이다.

뒤늦게 동기라도 알고 싶다며 집으로 찾아간 기자에게 K씨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가 먼저 죽으면 아홉 살이나 아래인 아내가 고생할 것 같아 모아둔 돈이었는데 아내가 8월 당뇨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버렸어요. 언젠가 ‘소년소녀 가장들을 돕고 싶다’고 한 아내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6·25전쟁 당시 고향인 황해도 재령을 떠나 남으로 내려온 K씨는 인천 부둣가의 노역인부로 남쪽 생활을 시작했다. 50년 간 두 딸을 시집보내고 서울 강북에 4층짜리 상가건물을 소유할 정도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아내의 내조 덕이었다는 게 그의 설명.

K씨는 11일 동아꿈나무재단에 들른 후 바로 은행에서 통장 하나를 개설했다고 말했다.

“죽은 아내도 이웃을 도왔는데 나도 도와야지요. 죽기 전에 이 통장에 돈을 좀 모아 한번 더 기부할 생각입니다.”

한편 14일 오후 5시 동아일보 김병건(金炳健)부사장 등 동아일보와 동아꿈나무재단 관계자들은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화천장학재단’ 사무실을 찾았다. 이날로 미수(米壽)를 맞은 이 재단의 권희종(權熙宗·88)이사장에게 고마움과 축하의 뜻으로 행운의 열쇠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86년 3월31일 안동 권씨 화천군파 종친회장인 권씨는 조선시대 판서였던 조상이 1487년 왕에게 하사받은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땅(7400여평·당시 시가 18억원대)을 ‘영재를 키우는 데 써달라’며 동아꿈나무재단에 기증했다.

꿈나무재단 측은 이 땅을 89년 서울시에 30억원에 매각해 그 돈으로 지금까지 수백명의 근로청소년과 20여곳의 장애인학교에 ‘희망’을 보냈고 이 돈에서 나오는 매년 2억∼3억원의 이자로 불우이웃과 청소년들을 돕고 있다.

<최호원기자>bestiger@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