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Magazine]"사랑은 계속되어야 한다"

  • 입력 2000년 11월 5일 19시 37분


불쌍한 래빗 앵스트롬. 그는 무대에서 사라져버렸다. 래빗을 만들어낸 작가 존 업다이크가 1990년에 그를 56세라는 나이에 죽여버렸기 때문이다(당시 업다이크는 래빗보다 두 살이 더 많았다). 업다이크는 아마도 래빗을 죽이면서 독자들에게 이제 생명이 다음 세대의 인물들로 이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듯하다.

그런데 그 래빗이 돌아왔다. 비록 유령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기는 하지만 이번 달에 발표될 예정인 중편소설 ‘래빗에 대한 기억’에서 그는 분명히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사라지고 없는 동안 래빗의 아내인 재니스는 하필이면 래빗의 옛 동료이자 라이벌이었던 로니 해리슨과 결혼했다. 재니스와 로니는 지금 60대지만 아주 만족스러운 성생활을 즐기며 살아가고 있다. 로니는 사랑을 나누는 분야에서 가히 래빗과 맞먹을 만하고 재니스는 자기가 자주 오르가슴을 느낀다고 자랑한다.

활발한 성생활을 즐기며 살아가고 있는 소설 속의 노인은 또 있다. 솔 벨로가 최근에 발표한 소설 ‘레이벌스타인’에서 화자로 등장하는 치크가 바로 그 사람이다. 치크는 갓난 딸의 아빠가 아니라는 점만 빼면 올해 85세인 벨로와 상당히 닮은 모습을 하고 있다. 애정이 식어버린 결혼생활에서 몸을 빼냈다는 점,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았다는 점, 자기보다 훨씬 어린 여성의 품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있다는 점 등이 치크와 벨로의 닮은 점이다.한편 필립 로스의 소설에 등장하는 네이선 주커만도 60세를 넘긴 노인이면서 여전히 당당함을 자랑하고 있다. 그는 치크나 로니처럼 활발한 성생활을 즐기고 있지는 않다. 불쌍하게도 전립선 수술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 ‘인간적인 오점’에 등장하는 그는 전혀 당당함을 잃지 않았으며, 과거보다 훨씬 더 편안함을 느끼고 있다.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사람들은 한때 미국 문단의 강력한 남성우월주의자들이었던 이들 작가들이 지금쯤 양로원의 구석진 자리나 차지하고 있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들은 아직도 열심히 글을 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처럼 일정한 나이가 지났는데도 무대에서 사라지기를 거부하고 있는 인물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이것은 남성작가들만의 현상도 아니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새 소설 ‘눈 먼 암살자’에는 벨로의 주인공 치크와 거의 나이가 비슷한 아이리스 체이스 그리핀이 화자로 등장한다. 그녀는 연약하고 때로는 변덕을 부리기도 하지만 아직도 또랑또랑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에게 비밀로 했던 연인에 대한 따스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사실 이 새로운 소설들은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니다. 소설, 특히 사실주의적인 소설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르이고 우리 사회는 전문가들이 계속해서 지적하고 있듯이 노령화되고 있다. 우리는 옛날보다 더 좋은 건강과 더 긴 수명을 누리면서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처럼 중년이 되어도 무대에서 우아하게 퇴장하는 것을 별로 내켜하지 않는다.

예전에 미국 소설의 위대한 테마는 자신의 발견과 성숙이었다. 그래서 몇 가지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피츠제럴드나 헤밍웨이 같은 작가들은 일찌감치 빛을 발하다가 또 일찌감치 쇠퇴해갔다. 그런데 이제 미국이라는 나라가 성년기를 맞이한 시점에서 우리는 새로운 종류의 소설의 등장을 목격하고 있다. 이 새로운 소설은 결코 예전의 소설들처럼 고상하거나 낭만적이지 않다. 그러나 이 새로운 소설은 특히 장년기 이후에 발견하는 기쁨과 불만들을 훨씬 더 정직하게 그려내고 있다. 과거에는 중년의 등장인물이 성적인 충동에 따라 행동하는 경우 반드시 불행한 결말을 맞았다(가족을 버리고 여배우를 쫓아다녔던 ‘시스터 캐리’의 허스트우드가 한 예이다). 원래부터 사랑을 쫓아다니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은 마치 우리 부모와 같았다. 다시 말해 그들이 무슨 일을 몰래 하고 있는지 우리는 별로 알고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업다이크, 벨로 같은 작가들이 이 금지된 방, 즉 부모의 방이나 조부모의 방을 슬그머니 들여다보려 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가 그들에게 그래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들의 소설에 등장하는 노인들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사랑을 하고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우리의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이 인물들이 자신들에게 허락된 인생이 예전보다 더 길어졌다는 데 스스로도 놀라고 있으며 이 새로 허락된 시간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약간은 어쩔 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이 소설들을 읽는 것은 주인공들에게 곧 죽음이 다가올 것이라는 점 때문에 마치 생나무를 태우는 연기를 들이마시는 것처럼 맵다. 그러나 그것도 그리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아무래도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이야기는 결코 재미가 없는 법이니까.

(http://www.nytimes.com/library/magazine/home/20001022mag―wwl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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