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방형남/프랑스의 과잉친절

  • 입력 2000년 11월 5일 18시 36분


지난달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온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유난히 호들갑을 떨었다. 그는 공식석상에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을 만날 때 큰 몸짓으로 양손을 감싸쥐면서 마치 수십 년 친구라도 되는 듯 살갑게 굴었다. 10월21일 ASEM 폐막 기자회견 때는 ‘BRAVO! GREAT SUCCESS! THANK YOU, D J KIM’이라는 메모를 써서 옆에 앉은 김대통령에게 건네 한국 언론의 관심을 끌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ASEM 정상회의에 앞서 김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시라크 대통령은 한국과 프랑스의 최대 현안인 외규장각 도서 반환 문제를 내년까지 해결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나 발표로 보면 시라크 대통령은 김 대통령을 절친한 친구로 좋아할 뿐만 아니라 한국이 섭섭하게 생각했던 외규장각 도서 반환 문제에 대해서도 큰 성의를 보인 것으로 비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유감스럽게도 한국과 프랑스의 과거를 조금만 돌아보면 시라크의 유난스러운 제스처가 가식(假飾)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버릴 수 없게 된다. ‘프랑스 대통령의 친절과 외규장각 도서 반환 약속’은 이미 있었던 ‘드라마’의 속편이기 때문이다.

전편은 93년 9월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서울을 방문해 김영삼(金泳三)대통령에게 외규장각 도서 가운데 한 권을 돌려주며 나머지를 반환하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다. 당시 한국정부는 고속철도 차량을 프랑스의 TGV로 할 것인지, 독일의 ICE로 할 것인지를 고민하던 시기였다. 프랑스는 이런 결정적 시기에 한국을 향해 호의를 보였다. 이 때문에 미테랑의 약속이 이듬해 한국이 TGV를 선택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두고두고 나오고 있다.

시라크의 웃음 뒤에 뭔가 속셈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건 이번에도 한국 정부가 또다시 중요한 결단을 내릴 시점이 눈앞에 다가왔기 때문이다. 한국은 내년 봄 40억달러의 엄청난 돈이 들어갈 차기 전투기(FX) 도입 기종을 결정할 예정인데 4종류의 후보 전투기 가운데 프랑스의 다소그룹에서 만든 라팔 전투기가 들어있다. 시라크 대통령이 이 같은 사정을 모를 리 없다. 그리고 다소가 전투기를 팔기 위해 기울이고 있는 노력은 9월 한국기자 몇 명이 라팔 제작공장을 방문했을 때 태극기까지 게양한 정성을 통해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한국은 TGV를 선택했으나 외규장각 도서 문제는 원점으로 돌아갔다.프랑스 정부는 국립도서관 학예관들이 외규장각 도서가 프랑스의 문화유산이라는 이유로 반환할 수 없다고 결사 반대한다며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과연 이번 드라마는 어떻게 결말이 날까. 마침 한국에서도 3일 역사학회 등 11개 학술단체가 외규장각 도서의 무조건 반환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양국 정상이 합의한 교환방식의 해결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며 반대하고 나섰다. 일부 대학에서는 교수와 학생들이 서명운동까지 시작했다.

과연 정부는 어떻게 할 것인가. 시라크 대통령의 과잉친절이 효과를 내게 할 것인가, 아니면 속셈이 뻔한 제스처로 만들 것인가.

방형남<국제부장>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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