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뿐만이 아니다. ASEM 정상회의에 앞서 김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시라크 대통령은 한국과 프랑스의 최대 현안인 외규장각 도서 반환 문제를 내년까지 해결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나 발표로 보면 시라크 대통령은 김 대통령을 절친한 친구로 좋아할 뿐만 아니라 한국이 섭섭하게 생각했던 외규장각 도서 반환 문제에 대해서도 큰 성의를 보인 것으로 비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유감스럽게도 한국과 프랑스의 과거를 조금만 돌아보면 시라크의 유난스러운 제스처가 가식(假飾)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버릴 수 없게 된다. ‘프랑스 대통령의 친절과 외규장각 도서 반환 약속’은 이미 있었던 ‘드라마’의 속편이기 때문이다.
전편은 93년 9월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서울을 방문해 김영삼(金泳三)대통령에게 외규장각 도서 가운데 한 권을 돌려주며 나머지를 반환하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다. 당시 한국정부는 고속철도 차량을 프랑스의 TGV로 할 것인지, 독일의 ICE로 할 것인지를 고민하던 시기였다. 프랑스는 이런 결정적 시기에 한국을 향해 호의를 보였다. 이 때문에 미테랑의 약속이 이듬해 한국이 TGV를 선택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두고두고 나오고 있다.
시라크의 웃음 뒤에 뭔가 속셈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건 이번에도 한국 정부가 또다시 중요한 결단을 내릴 시점이 눈앞에 다가왔기 때문이다. 한국은 내년 봄 40억달러의 엄청난 돈이 들어갈 차기 전투기(FX) 도입 기종을 결정할 예정인데 4종류의 후보 전투기 가운데 프랑스의 다소그룹에서 만든 라팔 전투기가 들어있다. 시라크 대통령이 이 같은 사정을 모를 리 없다. 그리고 다소가 전투기를 팔기 위해 기울이고 있는 노력은 9월 한국기자 몇 명이 라팔 제작공장을 방문했을 때 태극기까지 게양한 정성을 통해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한국은 TGV를 선택했으나 외규장각 도서 문제는 원점으로 돌아갔다.프랑스 정부는 국립도서관 학예관들이 외규장각 도서가 프랑스의 문화유산이라는 이유로 반환할 수 없다고 결사 반대한다며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과연 이번 드라마는 어떻게 결말이 날까. 마침 한국에서도 3일 역사학회 등 11개 학술단체가 외규장각 도서의 무조건 반환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양국 정상이 합의한 교환방식의 해결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며 반대하고 나섰다. 일부 대학에서는 교수와 학생들이 서명운동까지 시작했다.
과연 정부는 어떻게 할 것인가. 시라크 대통령의 과잉친절이 효과를 내게 할 것인가, 아니면 속셈이 뻔한 제스처로 만들 것인가.
방형남<국제부장>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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