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부산영화제, 더욱 "푸짐하게" "우아하게"

  • 입력 2000년 10월 10일 19시 06분


부산 남포동 거리는 지금 잘 익은 포도주향으로 가득하다. 전세계의 기름진 옥토에서 수확한 200여편의 영화를 포도알 삼아, 한여름 땡볕같던 영화의 정열을 다섯해나 숙성시킨 술독에 담아낸 포도주향으로.

올해 다섯돌을 맞는 부산국제영화제의 향이 익어갈수록 이를 맛보는 관객들의 입맛도 다양해 진다. 영화제 현장에서 만난 영화팬들의 부산영화제 즐기기.

▽폭식파Ⅰ-닷새간 식단 짜 하루 4~5편 강행군▽

서울―부산간 왕복 기차편과 하룻밤 숙박의 혜택을 부여한 ‘Korea.com 영화열차’에는 300명이 참여했다. 승객 중 부산영화제 최고중독자로 꼽힌 사람은 윤인애씨(23·현대자동차). 세 번째 부산영화제를 찾는 그녀는 여름휴가를 아껴뒀다 부산영화제 때면 주말을 끼고 부산에 가 하루에 네 다섯편의 영화를 봐야 직성이 풀린다. 윤씨는 영화제 프로그램이 나온 뒤 작품을 꼼꼼이 살펴보고 시간표를 짜는데만 꼬박 닷새를 투자했다. 좋아하는 감독의 작품이 최우선이지만 국내 개봉 가능성이 크다면 눈 딱 감고 제외해 버린다. 영화제에서만 볼 수 있는 영화를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끼니는 빵이나 햄버거로 때워가며 상영시간과 영화관간 거리까지 꼼꼼이 계산해 동선을 최소화하는 데 전력투구한다.

▽폭식파Ⅱ-주말 24시간 동안 7편 몰아치기▽

98년 대학에 입학한 이래 내리 3년 부산을 찾은 김운경씨(22·이화여대 영문과 3년) 역시 토요일 오전부터 일요일 막차를 타고 떠날 때까지 24시간 동안 7편을 몰아봤다. 그나마 한편을 ‘과감히’ 포기했던 것은 이번 영화제 첫 상영영화였던 ‘잉마르 베리만과 스벤 니크비스트’의 짜릿한 맛에 취한 혀를 다시 부드럽게 달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 그녀는 가장 존경하는 베리만 감독의 평생파트너였던 촬영감독 니크비스트의 전기성 다큐멘타리가 “지금껏 부산영화제에서 봤던 영화 중 최고”라며 눈물까지 글썽였다. 반면 일본의 거장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고하토’에 대해선 “영화의 분위기는 진지했지만 감독이 나이를 먹으면서 지나치게 젊음에 집착하는 것 같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분위기파-"영화보다 축제 분위기 더 즐겨요"▽

천리안영화동호회원인 이미선씨(23·웹디자이너)는 이제는 영화보다도 영화제 분위기 자체를 더 좋아한다. 토요일 새벽기차로 동호인들과 함께 부산에 온 이씨는 태종대부터 찾았다. ‘영화의 바다’에 빠지기 전 먼저 바다내음으로 속세의 때를 씻는 ‘의식’을 치르기 위해서다. 그날 세편의 영화를 맛본 그녀는 다시 해운대의 한 선술집에서 동료들과 영화얘기를 잔뜩 풀어놓고 그 열정을 노래방까지 이어가느라 밤을 홀딱 샜다. 다음날은 졸음이 쏟아져 영화를 여러편 보기란 힘든 법. 이씨는 첫해에는 자신이 영화를 보면서 잠을 잔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허벅지를 꼬집고 몸부림을 치면서 강행군을 계속했지만 올해는 그런 스트레스를 과감히 떨쳐버렸다. 그녀는 그날밤 해운대에서 야외상영된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어둠속의 댄서’ 단 한편을 위해 남포동쪽 티켓은 과감히 다른 관객들에게 양보했다. 그리고 3000여명이나 되는 사람들과 함께 중세의 수도승 복장을 연상시키는 우비차림으로 복장을 통일한 채 줄기찬 빗줄기 속에서 139분간이나 침묵의 서원을 수행하며 얻은 법열을 삭이기 위해 달맞이언덕의 해운정으로 올랐다.

▽미식파-"잡탕은 싫다" '코스요리'로 맛 즐겨▽

4년째 부산을 찾은 이나라씨(27·서울대 미학과 석사과정)는 체력과 시간대별 감정선까지 고려해 식단을 짰다. 우선 영화에 대한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새벽기차나 밤기차를 피하고 토요일 아침기차편으로 느긋하게 부산에 도착했다. 첫날은 ‘당신의 영원한 친구, 해리’를 시작으로 ‘생 피에르의 미망인’ ‘체스왕 루진’ 등 비교적 대중적인 유럽영화로 입맛을 돋운 그녀는 다음날은 이번 영화제의 메인디시로 꼽은 ‘어둠속의 댄서’의 달콤한 맛을 만끽하기 위해 역시 군것질은 삼가했다. 대신 마침 해운대에서 열리고 있는 부산국제아트페스티벌(PICAF)의 설치미술작품을 감상하며 미각을 단련하는 노련함을 보였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그녀는 생수처럼 담백하기 그지없는 이란영화 ‘순환’으로 입을 헹군 뒤 중국대륙을 건너온 ‘귀신이 온다’와 천산을 넘어온 ‘루나 파파’같은 특식들로 혀를 옮겨갔다.

<부산〓권재현기자>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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