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홍찬식/경기고 100년

  • 입력 2000년 10월 2일 18시 37분


꼭 100년 전 오늘, 최초의 중학교가 서울 종로구 화동 언덕에 문을 열었다. 오늘날의 경기고를 말한다. 요즘 ‘정보화’가 최대 관심사이듯, 당시 조선의 지상 과제는 ‘개화(開化)’였다. 고종황제는 서구식 교육을 도입해 근대화를 꾀하고 침몰 직전의 나라를 구하려 했다. ‘관립중학교’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경기고는 평준화정책이 시행되기 전인 70년대 중반까지 첫손 꼽히는 명문고로 자리잡았다.

▷경기고가 있던 화동 일대는 내로라 하는 양반들이 사는 고급주택지였다. 경복궁과 인접해 있어 관직에 있는 양반들이 ‘출퇴근’하기 편했기 때문이다. 경기고 터는 개화파 김옥균과 서재필의 집이 있던 곳이다. 갑신정변 이후 이들이 외국으로 망명하자 조선 정부가 집을 몰수해 학교 터로 삼은 것이다. 사육신 성삼문의 집터도 학교 바로 앞에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역사의 살아 있는 현장인 옛 경기고 건물(현 정독도서관)은 건축사적인 의미로 보아서도 영구 보존해야 한다는 소리도 있다.

▷우리 근대교육의 역사는 경기고 개교 100년과 함께 1세기를 넘어선다. 그동안 우리 교육은 어떤 성과를 남겼나. 교육제도에 대한 국민 불만은 높지만 과거 경제발전을 견인했던 힘이 교육이었던 점도 사실이다. 특히 경기고는 이른바 엘리트교육의 선두에서 상당한 우수 인재를 양성해 냈다는 점에서 평가를 받고 있긴 하지만 과도한 입시경쟁과 치맛바람을 일으키는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74년 고교평준화 이후 경기고와 같은 명문고는 ‘전설’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명문고의 ‘퇴장’은 하향평준화와 엘리트교육의 실종으로 이어졌다. 과학고와 외국어고가 있다지만 과거 명문고와는 성격이 사뭇 다르다. 다시 ‘명문고 시대’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나라의 미래가 소수 엘리트에 좌우되는만큼 엘리트교육을 살려내야 한다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학교선택권을 주는 ‘자립형 사립고’가 논의되는 것도 이런 배경일 것이다. 100년을 넘긴 중등교육은 이제 정보화시대를 맞아 시스템을 다시 짜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조선조말 고종이 ‘개화’를 꿈꾸며 새로운 학교형태인 관립중학교를 만들었던 것처럼.

<홍찬식 논설위원>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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