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엄담론]그린스펀, 그의 말엔 왜 힘이 있나

  • 입력 2000년 7월 24일 18시 36분


“수요가 적정 수준으로 떨어졌으며…. 아직까지는 임금 상승요인이 생산성 향상에 의해 상쇄되고 있으나 인플레 위험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경계할 필요가 있다.”

역시 그린스펀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인 그의 한 마디에 비틀거리던 미국 증권시장이 활기를 찾았다. 20일, 아직 인플레 위험이 있긴 하지만 과열 조짐이 있던 경기는 진정되고 있다는 그의 말이 13개월간 계속된 인플레 억제정책의 종료를 예고하는 것으로 해석되며 이날 뉴욕증시 주가가 일제히 상승한 것이다.

1987년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으로 취임한 이래 4년 임기의 의장직을 4번째로 연임하고 있는 이 74세의 노인은 때마다 무슨 기발한 생각을 가지고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이 아니다. 경제의 변화에 대해 여러 가지 분석과 처방전이 난무할 때 그는 조용히 원론적인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던지며 미국경제의 방향을 잡는다. 그의 판단과 처방은 10년 가까이 지속되는 미국 경제의 호황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 왔고, 사람들은 바로 그의 말이 가지는 그 실효성을 신뢰하며 그의 말을 정확히 해석하는 데 골몰한다.

던져진 말은 다시 말한 자의 본뜻을 추적해 가야 할 해석의 단서일 뿐이지만, 언어에 의지하지 않고는 그 단서조차 전달이 안 될 뿐 아니라 그 단서의 의미에 대한 해석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마르틴 하이데거의 말처럼 인간은 ‘존재의 집’이라는 ‘언어의 주택’에서 사는지도 모른다.

언어만 정확히 분석하면 인간의 사고를 명료하게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언어분석철학자들은 언어의 함축성과 임의성을 제거한 인공언어의 분석을 통해 수천년간 내려 온 철학적 논의들의 최종정리를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분석철학의 기린아였던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조차 후기에는 인공언어 대신 자연언어로 되돌아갔듯이, 형식화된 인공언어로 정리해 낼 수 있는 인간의 생각이란 극히 한정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건조한 인공언어로는 그린스펀은 물론이고, 6월14일 2차 남북정상회담에 앞서 김대중대통령에게 “돌아가라”고 했다는 북한 김정일국방위원장이나 이 말을 세상으로 끄집어 낸 대통령외교안보수석비서관 같은 언어의 연금술사들의 속내를 읽어 낼 도리가 없다.

그런데 자크 데리다와 같은 포스트모더니스트에게는 자연언어조차 존재의 집이 아니라 존재의 감옥으로 느껴진다. 데리다는 존재의 몸에 맞지 않는 그 견고한 감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말 사이를 미끄러져 다닌다. 쉴 사이 없이 말을 하고는 다시 그 말을 피해다니며 ‘진실’이 말의 감옥을 벗어나도록 한다.

불교에서 부정의 논리도 바로 이 언어의 감옥을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이것이 아닌 것이 아닌 것도 아니며….” 듣다가 환장할 말 장난 같지만 이것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정의해 주려는 것이 아니라 말의 감옥에서 벗어날 때에만 ‘그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음을 가르쳐 주는 설명방식이다.

언어는 인간의 섬세하고 미묘한 마음과 사고를 담기에는 너무도 엉성한 소쿠리다. 이 때문에 오전에 그린스펀의 말을 듣고 상승했던 주가가 때로는 그의 말을 혹시 잘못 해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로 인해 오후장에서 하락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린스펀의 말이 갖는 힘은 불완전한 그의 말 자체가 아니라 언제나 그 말 뒤에 그것을 현실에서 실현시키기 위한 노력이 마련되고 있으리라는 신뢰에서 나온다. 말의 권세는 함축적 언어의 신묘한 마술 뒤에 숨어 책임을 회피할 길을 찾거나 견고한 말의 감옥에서 옥좌를 틀고 앉아 있는 자의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그 말을 실현할 길을 준비하는 자의 것이다.

김형찬기자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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