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홍호표/人間〓욕망의 개구리?

  • 입력 2000년 6월 7일 19시 02분


미국 동부의 한 대학 여성학과 게시판에는 이런 글이 붙어 있다.

‘No does not mean yes. Only yes means yes(노는 예스가 아니다. 예스만이 예스다).’

말하는 사람 중심의 예스와 노가 분명한 미국 사회. ‘성(性) 범죄’에 관한 한 미국에서조차 이런 표어가 나붙는 세상이다. 하물며 서양과 달리 나(I) 중심이 아니라 묻는 너(you) 중심으로 대답하는 언어와 사고의 체계를 갖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랴. 동굴 속 메아리의 메커니즘이 동원된 “안돼요∼, 돼요∼ 돼요∼”의 우스갯소리는 성에 관한 우리, 특히 남성의 시각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갇혀 있음으로 인해 생기는 편견을 꼬집은 플라톤의 ‘동굴의 우상’을 염두에 두면서 동굴 속으로 들어가 보자. 몸과 몸의 부적절한(또는 적절한) 접촉은 대부분 밀폐된 어둠의 공간에서 일어나므로.

동굴 속 동물은 촉각과 후각으로 이성을 찾는다. 그리고 접촉한다. 시각을 잃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생물학자 리처드 앨릭잰더는 귀뚜라미로 짝짓기 실험을 했다. 그 결과 밝은 세상에 사는 귀뚜라미와 동굴에 사는 귀뚜라미의 성생활에서 차이가 발견되지 않았다. 체위도 다르지 않았다.

촉각의 주체인 몸. 종래 ‘몸의 담론’은 해방 중심이었다. 서양에서는 중세 이후 성은 생식의 수단으로밖에 인정되지 않았다. 여성의 ‘신음’은 부정한 것으로 간주됐다. 중세 수도사는 수음을 하다 발각되면 며칠을 굶어야 했다. 그래서 수도사에겐 딱딱한 침대만 주어졌다. 수도원의 분위기를 느끼고 싶으면 양영순의 만화 ‘누들누드’를 보라.

이같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은 프랑스혁명을 거치면서 ‘성은 쾌락이다〓진보적 사고’의 틀로 자리잡아 왔다. 입과 항문의 예찬론자인 사드가 혁명파의 일원이었음은 의미심장하다. ‘전투적 프리섹스’의 개념은 애너벨 청이 조롱과 욕망을 뒤섞어 몸으로 실천한 마라톤섹스로 나타났다. 세상은 폼페이 음화(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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