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엄 담론]카레이스키, 그들은 무엇으로 살았는가

  • 입력 2000년 6월 5일 19시 25분


카레이스키(고려인) 4세 올가 김. 카자흐스탄의 옛 수도인 알마티의 베레케아이 시장에서 반찬을 만들어 팔고 있는 65세의 할머니다. 그의 증조부는 가족들과 함께 조국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했고, 그는 두살 때인 196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에 따라 부모의 품에 안긴 채 중앙아시아 벌판에 내던져져 지금껏 살아남았다. 도대체 이제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또 지금도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자신도 납득할 만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그에게 “산다는 것은 도깨비짓”이란다.

▼카레이스키들 고달픈 삶▼

그와 비슷한 연배의 카레이스키들에게는 부모 형제들이 굶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이제 그의 세 딸은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각지에 시집가 살고 있고, 아들 내외와 함께 살고 있는 알마티는 그가 처음 내던져졌던 카라탈스키로부터 약 300㎞ 떨어진 큰 도시다. 하지만 그의 삶은 아직도 고달프다. 매일 음식 재료를 사서 밤늦도록 반찬을 만들어 다음날 시장에서 판다는 그는 도대체 얼마를 벌어서 살아가고 있는지 자신도 정확히 알지 못할 정도로 근근히 삶을 이어간다.

가난을 견딜 수 없어서, 또는 조국을 침탈한 일본과 싸우기 위해 조국을 떠났던 사람들. 죄없는 이들의 후손이 알마티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는 합리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조리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역사의 거센 물결에 휩쓸리며 살아온 이들에게 인간의 삶은 세상이 부조리하다고 해서 고통과 좌절감 속에 마감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알베르 카뮈의 말처럼 오히려 부조리를 정면에서 바라봄으로써 세계에 대한 경멸과 거부 또는 타협이 아니라 행위와 저항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 부조리를 만들어 낸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바로잡는 것이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이겠지만, 텅빈 중앙아시아 벌판에 던져진 극한 상황에서 사회구조의 문제와 같은 세련된 비판을 이야기할 겨를이 없다.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가치론적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 현실 속에서 때로는 물리적 인과관계마저도 극복해버리는 인간의 의지였다. 이들로서는 ‘생존 의지’ 이전에 어떤 존재 이유도 있을 수 없었다.

이 생존의지는 이들이 처음 강제이주됐던 카라탈스키를 카자흐스탄 최고의 곡창지대로 만들었다. 지금도 그곳에 살고 있는 카레이스키들은 지난 시절에 겪어 온 멀고 먼 인생길을 잊지 않는다. 이들은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민족애와 공동체 의식을 공유한다. 이 같은 카레이스키가 알마티에만 2만명, 카자흐스탄 전체에 10만명이다. 하지만 그 멀고 먼 사연은 카레이스키만의 것은 아니다. 올가 김은 전세계 140여 개국에 흩어져 조국과 동포애를 그리워하고 있는 약 600만명 한민족 중 하나다.

▼영원히 이어질 민족의 역사▼

우리에게는 이렇게 나라의 안팎을 나누는 국경보다 더 길고, 나와 남을 나누는 아집보다 더 깊은 인생과 역사와 세계화의 길이 놓여 있다. 이 길을 걸어가는 한 개인이 자신의 삶 속에서 행하는 순간순간의 선택들, 그리고 개인의 존재를 흔적조차 지워버리는 역사의 흐름이 멀고 먼 시간과 핏줄의 여정을 거쳐 현재의 ‘나’를 만든다. 그리고 이런 개인의 진중한 한 걸음이 또 하나의 ‘민족사’를 만들어 간다.

올가 김 할머니의 역사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작되지 않았고 알마티에서 끝나지 않는다.

<철학박사 김형찬기자>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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