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김종성/지난 역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자

  • 입력 2000년 6월 5일 19시 25분


지난해 4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안동 하회마을을 찾아가 우리의 전통문화를 접하는 기회를 가진 바 있다.

세계 언론의 관심이 컸음에 비추어 우리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좋은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믿는다. 한국의 전통 가옥구조와 정원, 음식문화, 그리고 탈춤은 한국적 이미지를 전세계에 잘 전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전통문화를 자랑하는 좋은 자리를 마련해 놓고 지붕 위에서, 나무 위에서 여왕의 행차를 구경하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다고 느꼈다. 문화의 외양보다는 그 문화가 녹아 있는 행동양식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공자는 사람의 어진 마음을 인(仁)이라 하고, 옳은 마음을 의(義)라 하며, 그 인과 의에 형식을 주는 것이 바로 예(禮)라고 하였다. 이는 일상생활에서 예를 중시하면 그 습관이 행동을 지배하게 됨으로써 행복한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으로서 예는 다름 아닌 행동양식을 규율하는 틀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예의가 있듯이 나라에는 국가의식이 있고, 그 가운데 가장 상징적 의미가 큰 의식이 바로 현충의식이다. 이는 국가공동체를 위한 희생을 기리고 그 공동체를 지키고자 다짐하는 국민제전으로서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지 가장 큰 행사로서 최고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미국의 메모리얼데이(Memorial Day), 영국의 포피데이(Poppy Day), 호주의 앤잭데이(Anzac Day) 등이 그것이다. 이들 나라에서 이날은 지난 역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조국에 헌신을 다짐하는 열기로 가득 찬 국민적 축제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현충의식은 24절기 가운데 하나인 망종(芒種)일을 택하여 거행되고 있다. 예로부터 이날은 곡식을 심는 날인 동시에 제사를 지내는 날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제례(祭禮)를 통하여 죽음을 생명으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조상의 슬기를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현충의식에는 망종이라는 절기가 상징하는 것처럼 생명 또는 생산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공자는 제자 자공(子貢)이 조상에게 제사지낼 때 양을 죽여서 제사상에 올리는 것이 낭비라 생각하고 없애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묻자 “자네는 양을 죽이는 것을 아까워하지만 나는 예가 죽어가는 것을 안타까워한다”고 답했다.

이와 같이 의식은 비록 성가시고 또 그래서 겉치레로 흐르기 쉽지만 선조와 나를 이어주고 나라와 국민을 이어주는 일체화 과정이기 때문에 결코 소홀히 취급되어서는 안된다. 나라의 제삿날인 현충일은 경축일이나 여느 기념일과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작년 현충일의 경우를 보면 국립묘지를 비롯한 행사현장을 제외하고는 어디서도 현충의 분위기를 느낄 수 없었다. 언론에서도 국가 최고의 상징적 의미를 지닌 현충일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너무 부족했다는 지적이 많았다. 모두가 곰곰이 되씹어볼 문제가 아닌가 한다.

현충의식은 한 알의 밀알이 썩어 수많은 열매를 맺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로운 죽음이 밑거름이 되어 튼튼한 국가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생산적 활동으로 자리잡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국가공동체의 유지 발전을 위하여 희생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에 대한 진정한 예가 될 수 있고 또한 나라의 미래도 보장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지금처럼 민족의 화합과 단결, 국가번영을 모색해나가야 할 때 선열에 대한 예에는 더 큰 정성이 담겨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온 국민이 함께 추모하고 조국에 대한 사랑의 뜻을 같이 나누는 최고의 국가의식으로서의 위상을 되찾아주지 않으면 안된다.

김종성(국가보훈처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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