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주왕산 내원마을/전기-전화도 없어

  • 입력 2000년 5월 31일 20시 00분


인터넷에, 위성통신에, 컴퓨터에…. ‘후기산업사회’라는 말도 증발하듯 사라지고 대신 ‘디지털시대’라는 애매모호한 말이 그 자리를 메운 불확실성의 세상. 그런데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양초. 아날로그 이전부터 존재해온 화석같은 이 물건. 디지털 아니라 디지털의 할아버지 시대가 와도 존재할 것 같은 물건 아닌가. 양초의 포장상자 역시 지난 30여년전 모습에서 변한 게 없다. 주황색 단색의 얇은 도화지로 만든 포장상자에는 ‘촌스러운’ 옛 글씨체로 ‘○○양초’라고 쓰여 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물건이다.

그 양초 포장에서 느꼈던 반가움과 놀라움 신선함. 경북 청송의 주왕산을 찾았다가 들른 해발 500m 산 위의 내원마을(청송군 부동면 상의리)은 바로 이 유물같은 양초 포장이 불러일으키는 향수와 추억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정겨운 산골 오지마을이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 상상하는 것 조차 고통이다. 이 고통은 예서 끝나지 않는다. 전화마저 없다. 이제는 생활필수품이 되어 버린 인터넷이니 컴퓨터니 하는 것도 여기서는 ‘터미네이터’ 같은 SF영화속 미래의 괜찮은 물건처럼 간주된다. 우편물마저 산 아래 국립공원관리사무소까지만 배달된다.

“그나마 석달전 휴대전화(017)가 터져 요즘은 한결 좋아졌습니다.”

내원마을 여덟가구 가운데 관광객을 상대로 차를 파는 네 집 중 하나인 ‘사슴할아버지댁’의 허윤규씨(52) 말이다. 그러나 휴대전화가 ‘터지는’ 장소는 단 세곳. 이 집 유리창가와 집옆 텃밭의 구릉위 등지. 배터리는 매일 산 아래 마을에서 충전해다 쓴다. 지난해 비상용 공전식전화기가 설치됐으나 태풍으로 전화선이 끊긴 후 현재까지 불통상태. 사는데 어려움도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고된 것은 45㎏이나 나가는 액화석유가스(LPG)통을 주왕산 제1폭포에서 오토바이에 싣고 산을 올라 다시 등짐으로 나르는 일이라고.

이곳에 마을이 선 것은 400여년전. 50년대 후반에는 숨어든 빨치산 때문에 주민피해도 컸다고 한다. 어지간하면 70년대초 산 아래동네 전기가설 때 혜택을 보았으련만 이런저런 이유로 늦어지다가 결국은 주왕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76년)된 후 전기가설은 아예 물건너 갔다고 한다. 그래도 사람의 삶이란 끈질긴 것. 여러 가구가 대처로 떠났지만 거꾸로 허씨처럼 찾아 든 사람도 있어 현재 여덟가구가 오순도순 모여 살고 있다.

“저녁이면 반장님댁에 모여 감자 구워 먹으며 이야기 꽃을 피우지요.” 그러면서 허씨는 내원마을 여덟가구를 하나하나 소개했다. 폐교된 내원분교를 개조한 산골카페 ‘내원산방’, 33년째 살면서 실의에 차 산에 오른 사람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어 새 삶을 살도록 인도해 유명해진 권영도씨(67·산 중턱의 대피소에서 관리인으로 근무)의 ‘사슴할아버지댁’, 한달만 수양하자며 왔다가 스물다섯해를 맞은 ‘예천할매댁’, 42년전 장가들어 온 반장 김희걸씨의 ‘토박이집’, 그리고 ‘재준댁’‘고사리부인댁’‘억만할배댁’, 스님이었다는 ‘정도사집’, 9대째 사는 토박이로 8남매를 낳은 할머니의 ‘본동댁’(마을 입구로부터 가까운 순서). ‘내원동 가는 길’이라는 시집을 낸 방랑시인 이준상씨는 벌써 몇 해째 억만할배댁 작은방에, 허씨는 부인 김혜자씨(46)와 단 둘이 벌써 5년째 사슴할아버지 집에 머물고 있다.

여름이면 반딧불이가 밤을 수놓는 자연안에서 공해에 오염되지 않은 맑은 물과 공기, 채소로 살아가는 산골생활이 점점 좋아진다는 허씨. 취미삼아 조각해온 남근(男根)목각 덕분에 최근에는 남근(南根)이라는 호까지 얻었다. 출가하거나 대학생인 자녀들과 떨어져 내원마을 주민이 되기 위해 ‘맹연습’중인 허씨부부는 내원마을 사슴할아버지댁에 가면 언제든 만날 수 있다. 휴대전화 017-516-2114, 주왕산대피소(권영도씨) 0575-873-7686

▼280년전 만든 주왕산 주산지▼

건듯 부는 산들바람에도 연못 속의 준봉과 거산은 산산이 부서진다. 진록의 물색깔이 그 안에 빠진 산을 뒤덮은 현란한 신록보다 몇배 더 짙다. 연못을 감싼 적막도 무게가 예 빠진 산보다 무겁다. 그러나 영롱한 산새의 한 울음소리에 그 적막도 깨져 무너진다.

연못 주산지(注山池·경북 청송군 부동면 이전리)를 보면 태고를 상상케 된다. 워낙 알려지지 않아 찾는 발길이 뜸한데다 주왕산 주변의 깊은 산속에 숨겨진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범상치 않은 연못 풍경 때문이다. 물에 잠긴 채 축축 늘어진 가지를 드리운 수백년된 왕버드나무. 그 가지 표면을 덮은 푸른 물이끼의 더께가 세월의 장구함을 대변한다. 서울보다 한달은 더 늦게 찾아 오는 주산지의 봄 어느날, 못 주변은 몇그루 늙은 산벚나무 가지에서 핀 하얀 꽃으로 화사했다. 불과 길이 100m 폭 50m의 자그마한 연못. 그러나 이 연못에 마음이끌려 자주 찾는 팬도 꽤 된다. 청송땅이 워낙 오지인 탓도 있지만 연못을 아끼는 사람들이 말을 아끼는 바람에 그리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아 자연이 그대로 간직돼 있다. 주왕산국립공원 안에 있으면서도.

그러나 이 연못도 알고보면 사람이 만든 저수지(1721년)다. 모든 게 너무도 자연스러워 유수구의 댐을 보기 전까지는 인공의 흔적을 알아챌 수 없다. 지금도 절골 계곡안의 50여명이 이 저수지물로 농사를 짓고 있다.

▽가는 길: 국도 31호선∼청송읍∼지방도로 928호선∼이전리∼절골∼주산지

▼가는 길▼

국도 31호선∼청송읍∼지방도 928호선. 주왕산국립공원과 주산지 가는 길은 주왕산초등학교 앞에서 갈린다. 주방천을 따라 곧장 당마을로 가면 주왕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 오른편 길로 가면 이전리에서 절골로 가는 도로가 연결된다.

▼등산로▼

코스는 매표소∼대전사∼급수대∼학소대∼제1폭포∼산신제단∼내원마을. 주왕산의 비경을 두루 볼 수 있는 대표적인 등산로. 내원마을에서 가메봉(해발 907m)까지 산행시간은 2시간20분 소요.

▼여행상품▼

승우여행사(02-720-8311)는 4(일)∼6일(현충일) 징검다리 연휴를 맞아 내원마을과 주산지를 둘러 보는 답사여행상품을 판매한다. 출발은 서울. △무박2일〓출발 3, 5일. 4만8000원 △2박3일〓출발 4일. 문경새재∼왕건 촬영지∼주왕산∼내원마을(숙박)∼주산지∼옥계계곡∼강구항∼칠보산자연휴양림(숙박) 해맞이∼백암온천∼영양∼청량산∼영주. 14만5000원(어린이 2만원 할인)

<주왕산(경북청송)=조성하기자>summ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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