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송영언/'큰 바위 얼굴'을 보고 싶다

  • 입력 2000년 5월 31일 19시 19분


며칠전 한 모임이 있었다. 교수 벤처기업인 고위공무원 등 나름대로 우리 사회의 지도층이라 할 만한 사람들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는 최근 시민들을 분노케 한 여러 사건이 자연스럽게 화제가 됐다.

젊은 정치인들의 '광주술판', 시민운동가와 국책연구원장 등의 성추문, 여류 로비스트에 놀아난 전직 장관과 전직 국회의원의 망신…. 주된 얘기는 자리의 소중함과 이들의 일탈행위였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만 이들의 경우는 오히려 자리가 사람을 버려놓았다는 것이다.

확실히 이들은 그 자리에서 해야 할 일과 성취감보다는 자리가 주는 잘못된 권위와 특혜에만 눈이 어두웠다. 자리를 이용해 아름답지 못하고 부적절한 행위들을 했다.

얘기 도중 전체적인 분위기와는 다소 다른 목소리가 나왔다. "만일에 우리도 유명해진다면 언젠가 추락할지 모른다. 일단 유명해질 생각을 하지 말자. 설사 유명해진다 해도 모두들 실수하지 말고 조심해야 한다"고 한 참석자가 말했다.

그는 우리 사회가 전체적으로 사람을 키우지 않고 조금만 앞서 나가면 끌어내려 버린다고 말했다. 그래서 너무 잘 나가면 어떤 장애물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 자나깨나 조심하자는 얘기였다.

물론 이번에 물의를 빚은 사람들을 그 같은 범주에 넣을 수는 없다. 그들은 누가 보기에도 변명할 수 없는 행위를 했다. 공인에게는 일반인보다 한층 더 가혹한 도덕적 잣대가 적용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를 새롭게 정화시키겠다고 다짐한 젊은 정치가나 시민운동가라면 다른 사람과는 조금이라도 달라야 했다.

우리 사회에는 왜 이처럼 조금 일을 할 만하면 자신의 덫에 걸려 쓰러지고 마는 사람들이 많을까. 자신을 엄격하게 다스리지 못한 공인들이 왜 그처럼 많은가. 어떻게 보면 안타깝고도 슬픈 일이다.

이 대목에서 조금은 다른 생각을 해본다. 많은 사람이 이들의 추락을 안타까워하기보다는 오히려 고소해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아닌지. 평소 곱지 않게 행동하더니 잘 걸렸다는 분위기가 없지는 않은지.

실제로 우리 사회에는 누군가가 한번 걸려들면 세차게 몰아치는 경향이 있다. 어떤 때 보면 모질고 잔혹하다.

우리나라에서 정말 당신이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선뜻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유명해질수록 사방에서 발목을 잡는다. 조그만 실수와 실언도 용인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를 키워주지 않고 믿지도 못한다.

대통령 장관 고위공직자 국회의원 기업인 문화예술인 연예인 등 유명 인사라면 누구도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인가. 우리나라의 유명 인사 중 한점의 흠도 없는 사람을 꼽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너새니얼 호손의 단편소설 중에 '큰바위 얼굴'이란 작품이 있다. 마을 앞 절벽 위에 인자하고 현명한 형상을 한 바위가 있는데 오래 전부터 큰바위 얼굴이라 불렸다. 마을에는 언젠가 이 바위를 닮은 큰 인물이 나타날 것이라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마을사람들은 그 전설이 실현되기를 간절하게 기다린다.

우리에겐 큰바위 얼굴은커녕 아직 작은바위 얼굴도 없다. 이제는 큰바위 얼굴을 만나고 싶다. 여러 곳에서 많은 작은 영웅들이 나오고 그들이 자라 더 큰 영웅들로 발전해 나갔으면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공인으로 불리는 사람들의 자기관리가 중요하다. 뼈를 깎는 자기절제와 자기훈련이 필요하다. 여기에 사람을 키우려는 다른 사람들의 열린 마음이 더해져야 한다.

송영언<이슈부장> young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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