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불안 어디까지?]위기의 자본시장

  • 입력 2000년 5월 24일 19시 37분


‘하루하루를 버티기가 너무 힘듭니다.’(H투신 영업 담당 임원)

‘시장이 불안할 때마다 돈이 몰려 죽겠어요.’(H은행 자금 담당 상무)

200조원의 부동자금이 자리를 찾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는 가운데 금융시장 불안의 뇌관인 투자신탁회사와 자금이 넘치는 우량 은행은 이처럼 엇갈린 반응을 보이고 있다.

금융 불안을 초래하는 투신사를 어떻게 처리할지가 관건이다. 금융의 실핏줄인 투신사가 지금 동맥경화증에 걸려 있다. 투신사는 단순한 일개 금융기관이 아니다. 투자자와 자본시장을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은행 못지 않게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증권사 1, 2개가 무너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정부가 미적미적하던 투신권 구조조정의 마스터플랜을 제시하고 한국투신 대한투신에 4조9000억원의 공적 자금을 서둘러 투입하기로 했다. 상황이 그만큼 심각해졌음을 정부가 인정하는 대목이다.

▽투신사 ‘개점 휴업’〓정부가 다급해진 것은 투신사 기능 마비로 자본시장이 위기를 맞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 ‘내 코가 석자’라고 회사가 살아남느냐 죽느냐 하는 위기에 처한 투신사가 기관투자가 역할을 상실한 지는 이미 오래됐다.

투신사는 올 들어 4조원어치의 주식을 팔아치우며 증시 침체를 부채질했다. 수익은커녕 평균 20∼30% 손해가 난 펀드들이 대부분이다. 새 돈은 안 들어오는데다 있는 자금이나마 붙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한번 추락한 신뢰를 회복하기는 무척 어려운 게 현실. 김창문(金昌文) 대한투신상무는 “돈이 자꾸 빠져나가 주식을 사려야 살 수가 없다”며 “기관 역할을 못한다는 비난이 쏟아지지만 어쩔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기업들이 발행하는 회사채의 90%를 소화해 내는 투신사 채권운용부는 요즘 하루종일 콜과 기업어음(CP)만 돌린다. 채권시장은 아예 죽어 있고 자꾸 돈이 빠지기 때문에 있는 채권마저 팔아야 할 지경이다. 이윤규(李潤珪) 한국투신 채권운용부장은 “투신사가 아니라 아예 종금사로 전락한 꼴”이라며 “돈이 있어야 채권을 살 수 있는데 환매 때문에 먼저 돈을 내주고 나서 투신사는 채권을 팔지도 못하고 있는 지경”이라고 하소연했다. 이런 미매각 수익증권은 고스란히 투신사 자금 압박으로 연결된다. 노병수(盧炳秀) 투신협회 홍보실장은 “투신사 공사채펀드는 올 들어 44조원이 빠져나갔고 이중 33조원이 투자 기간 1년 이상인 장기형 펀드”라고 밝혔다.

▽고객 신뢰 상실이 문제〓“더 이상 투신사를 믿지 않으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신대식(申大植) 한국투신 이사는 투신권 신뢰 추락이 자금 유입의 걸림돌이라고 말한다. 대우채 환매 문제로 진통을 겪은 은행 등 금융기관들이 투신사를 ‘믿지 못할 곳’으로 단정하고 쉽사리 돈을 맡기려 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은행이 돈을 굴리는 수단으로 투신사를 택했지만 요즘은 “구조조정이나 끝나고 봅시다”라는 얘기만 할 뿐 ‘자칫하면 물린다’는 생각으로 돈을 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 방철호(方哲鎬) 대한투신 이사는 “정부가 투신권 구조조정 문제를 너무 미적지근하게 다루면서 차일피일하는 바람에 긴급 처방까지 내놓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설명했다. 고객을 달래고 영업을 강화해야 할 시점에 수시로 ‘구조조정의 종결점은 합병’이라는 시나리오를 흘리면서 불안감만 가중시키고 있다는 것.

▽정부 대책이 약효가 있으려면〓우선 땅에 떨어진 고객의 신뢰를 신속히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다. 최도성(崔道成·서울대교수) 증권학회장은 “투신사들도 이제 뼈를 깎는 자구 노력을 펼쳐 국민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며 “투신사 사장이 직접 나서 눈물을 흘리며 사죄하는 장면도 감수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당장의 문제는 7월 채권시가평가 시행에 앞서 만기가 돌아오는 60조원의 공사채 펀드 자금을 어떻게 다시 유치할지다. 공적 자금을 투입해도 시장 신뢰를 얻지 못한다면 이 돈이 투신사에 남아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다. 신탁재산 클린화 작업을 마친 한투와 대투는 이제 신상품 개발 등으로 자생력을 키워 진정한 기관투자가로 거듭나야 한다. 윤성일(尹聖一) 한국투신 조사공학부장은 “투신사로 자금이 들어올 수 있도록 정부와 업계가 공조 노력을 취하는 게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최영해기자>money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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