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법, 재판, 인간

  • 입력 2000년 5월 8일 19시 47분


판사만큼 외로운 직업도 없을 것 같다. 판사는 헌법과 법률, 양심에 따라 재판을 하게 돼 있지만 말처럼 간단한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 형사 피고인을 유죄로 판단해 사형을 선고해야 할 경우 판사는 극도의 고독감에 사로잡힌다고 한다. 미국처럼 배심원들이 유무죄를 결정해주기라도 한다면 책임을 나눌 수 있을 텐데….

▷사형선고 전후에 한동안 밤잠을 설치고 입맛이 뚝 떨어지는 증상을 겪는 판사들도 있다. “나에게 사형 선고일은 내 판단이 옳았는지를 피고인 본인에게 심판 받는 날”이라는 어느 판사의 고백을 들은 일이 있다. 이 판사는 그래서 사형판결문을 읽고 난 뒤에는 피고인의 표정을 골똘히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고 한다. 사형을 선고해야 할 사건인데도 무기징역을 선고하는 데 그치는 하급심 판사들이 있다는 얘기는 어떻게 보면 인간적이다. ‘위험한 판단’을 상급심에 미루고 싶은 심정이 이해된다.

▷판사들이 사형선고를 두려워하는 것은 오판에 의한 ‘사법살인’의 가능성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진범 아닌 사형수’가 지금까지 몇 명이나 있었는지에 대한 통계는 없다. 하지만 억울한 사형수는 늘 생길 수 있다. 가혹행위에 의한 허위자백과 거짓증언은 물론 ‘과학수사’에 대한 지나친 믿음, 인간의 편견 선입견 등 오판의 원인은 다양하다. 해리 블랙먼 전 미연방대법관은 은퇴 직전 “사형판결은 수사관과 재판관의 자의(恣意), 인종적 편견, 그리고 실수로 점철돼 있다”고 했다. 빈부(貧富)가 피고인의 생사를 가른다는 일각의 비판도 끊이지 않는다.

▷81년 경기 시흥농협청계분소 살인사건 범인으로 지목됐던 사형수가 각계 인사들의 탄원에 힘입어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가 19년 만에 가석방된다는 보도다. 의부관계를 맺은 시인 구상(具常)씨와 수감자 교화에 힘써온 박삼중(朴三中)스님의 도움이 특히 컸다고 한다. ‘억울한 옥살이’였다는 본인 주장이 법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나 40대 후반에 맞게 된 귀중한 새 인생이다. ‘법과 재판과 인간’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사례다.

<육정수논설위원>soo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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