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민병돈/베트남의 새로운 전쟁

  • 입력 2000년 4월 28일 18시 46분


25년 전 4월30일, 북베트남군 탱크가 굉음을 내며 사이공(현 호치민) 시내로 쇄도했다.

겁에 질려 탈출하려는 사람들의 아우성 속에 미국 대사와 대사관 경비병력을 태운 마지막 헬리콥터들이 미국 대사관 옥상을 이륙해 남(南)중국해상으로 날아갔다. 제2차 베트남전쟁에서 처절한 싸움 끝에 북베트남이 남베트남과 미국을 이긴 것이다.

필자가 그 전쟁에 참전해 보고 느낀 바 이 싸움은 장난감 같은 활을 든 ‘어린아이’와 위력 있는 과학무기를 가진 ‘어른’ 사이의 이상하고도 처절한 싸움이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그 싸움에서 ‘어린아이’가 이긴 것이다.

그 동안 많은 지식인과 언론인이 베트남 전쟁에서 남베트남 패망의 원인을 말할 때 흔히 남베트남 정부의 무능 부패와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 그리고 무엇보다 남베트남 내 공산세력의 끈질긴 투쟁과 사회 혼란 등을 꼽았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 면만 보고 하는 말이다.

전쟁에는 상대가 있다. 당시 우리나라는 남베트남을 도왔지만 반대편인 북베트남의 승리라는 관점에서 보면 다른 이야기도 가능하다. 즉 북베트남에는 지도자 호치민(胡志明·1890∼1969)과 그의 뛰어난 제자들이 있었지만 남베트남에는 그런 지도자가 없었다. 바로 그것이 북베트남이 승리한 요인이었다. 이 승리는 그때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호치민이 쟁취해 놓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호치민은 하노이에서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수립하고 세계를 향해 독립을 선언한지 꼭 24년째 되는 1969년 9월2일에 죽었다.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후 미국 개입으로 시작된 이른바 항미구국투쟁이 더욱 격렬해지고 있을 때였다. 심장병을 앓고 있던 그는 미리 유언을 남겼다.

‘전쟁 희생자들의 기념공원을 만들고 애국심을 길러라. 지방행정기관은 부상병이나 순직자의 부모 처자 중에 곤궁한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적절한 생계의 방도를 마련해 주어 그들이 결코 굶주리거나 추위에 떨게 방치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전쟁에 이기면 농업세를 1년간 면제하라.’

‘나의 시신을 화장하고 그 재를 셋으로 나누어 북 중 남부의 사람들을 위하여 구릉(丘陵)에 각각 묻어주기 바란다. 그리고 그 구릉에 동상이나 비석 같은 것은 세우지 말고 그 곳을 방문한 사람들이 휴식할 수 있도록 간결하고 넓고 견고하며 서늘한 건물을 세우고 식목계획을 세우기 바란다. 방문한 사람들이 기념으로 나무 한 그루씩 심고 그것들이 시일이 지나면 삼림(森林)이 되고 경치도 좋아지며 농사에도 유용하게 될 것이다. 그 곳의 관리는 노인들에게 맡겨주기 바란다.’

이 유언에서 소박한 품성과 인민을 사랑하는 진심을 느낄 수 있을 뿐 사후(死後)의 영예나 위광에는 추호도 미련이 남아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유서에서는 필승의 신념과 통일 조국건설의 희망을 피력하고 그것을 인민의 마음 속에 심어 주려는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그가 80 평생을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 그리고 베트남 인민을 위해 줄기차게 성공적으로 투쟁한 유능하고 청렴한 지도자임을 베트남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남베트남 인민들로부터도 존경받았다.

그가 키워낸 제자 보 구엔 지압(武元甲)장군의 탁월함은 당시 자유진영 국가들도 인정하고 있었다. 또 베트남 평화교섭을 위한 파리회담의 북베트남 대표단 특별고문 레 둑 토는 미국의 헨리 키신저와 공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됐으나 이를 거절했다. 전 세계의 명사들이 그렇게도 바라는 노벨상을….

이제 통일 베트남은 냉전시대 사회주의 국가의 가난, 오랜 세월 전쟁을 치른 나라의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장경제체제를 받아들이며 도이모이(개혁 개방)의 기치를 높이 들고 새로운 전쟁을 치르고 있다. 사회기강의 해이와 공직자의 부정부패, 국영기업의 비효율 등이 타도해야 할 새로운 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들과의 싸움 그리고 외국인들과의 경제전쟁이 무력전쟁보다 오히려 더 힘들다. 전혀 익숙하지 않은 싸움이기 때문이다.

베트남 사람들이 이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면 통일의 기쁨도 누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민병돈=예비역 육군중장·전육사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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