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 존]'러브레터'에 이은 이와이 순지의 '4월 이야기'

  • 입력 2000년 3월 31일 21시 06분


이제 막 시작하는 첫사랑을 보여주는 '러브레터'

이와이 순지 감독의 사랑 노래는 몇 번 들어도 지겨울 것 같지 않다. <러브레터>에 이어 또 다시 첫사랑 얘기인 것이 좀 쑥스럽긴 하지만 <4월 이야기>는 첫사랑에 대한 기억을 담은 <러브 레터>와는 달리 이제 막 시작하는 첫사랑을 보여준다.

<4월 이야기>의 구성은 3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홋카이도를 떠나는 우즈키의 시점 화면으로 시작하는 초반부는 관객으로 하여금 그녀의 깊은 고독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면서 평범하고 지루해 보이는 상황을 아주 사소한 에피소드로 촘촘히 엮는 이와이 순지의 재능이 빛을 발하는 대목이다. 동급생들이 우즈키에게 묻는다.“왜, 이 학교를 지원한 거죠?”우즈키가 답한다. “다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캠퍼스가 좋아서요". 그녀는 길을 물어 무사시노두 서점을 찾아 간다. 그리고 이내 서점의 단골이 된다.

영화의 중반은 홋카이도로 플래시백하여 보여지는 회상 장면이다. 뮤직 비디오 화면과 비슷한 이미지 쇼트를 배열하여 연대기적 서술을 배제한 채 우즈키의 절망을 보여주려고 한다. 시간은 무의미하다. 다만 주인공의 감정을 따라 영상이 서술되는데 그 과정에서 플롯의 비밀이 서서히 밝혀지기 시작한다. 여고 3학년 학생 우즈키는 첫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다. 남자는 도쿄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여 홋카이도에는 없다. 한 친구가 그의 소식을 알려준다. 무사시노 대학촌의 한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종반부. 이제부터는 퍼즐의 몇 조각을 맞추면 된다. 그녀는 열심히 공부하여 거짓말처럼 남자와 같은 대학에 입학한다. 이제 그와 조우하는 것만 남았다. 장소는 바로 무사시노두 서점이어야 한다. 남자와 만나는 시퀀스는 영화의 하일라이트이자 유일하게 긴장감이 지속되는 대목. 마침 비가 내려 마지막 장면은 우즈키의 행복한 우중산책이 된다. 선배에게 빌린 찌그러진 빨간 우산을 쓰고 우즈키는 홀로 미소짖는다. 이제 <러브레터>의 잊을 수 없는 대사,‘오 겐키데스카'(잘 지내십니까)에 해당하는 대사가 나와야 할 때인데 여기서는 우즈키의 낮은 독백이 대신 깔린다.“내가 무사시노 대학에 합격했을 때 모두들 기적이라고 말했다... 나는 사랑의 기적이라고 말하고 싶다.”우즈키는 이제 사랑의 승리자가 된 것처럼 미소짓는다. 하지만 영화는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이제부터 상큼한 러브 스토리가 펼쳐져야 하는데 말이다. 영화는 물리적으로도 짧지만(67분) 미완의 이야기가 남기는 여운은 허망한 듯 지속된다. 마지막 장면은 냉소적인 사람에게는 우스운 감상주의의 소산으로 보이겠지만 고속촬영으로 보여주는 빗방울의 느린 움직임과 주인공 우즈키의 커다란 눈망울은 사랑하고 싶은 탄식을 자아낸다.

우즈키는 추억을 기억 저편에 가두어 두는 대신 집념을 다하여 소유하려는 존재다. 그녀의 순결한 표정을 보면 사랑을 향한 무한한 헌신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 헌신에는 과녁을 향해 자신을 내던지는 것 같은 맹목적인 집착이 드리워져 있는 것 같아 섬뜩함이 느껴질 정도. 더구나 그녀의 사랑은 이유도 과정도 없다. 그냥 남자를 사랑했고 사랑하기 때문에 남자를 향한 여행을 떠난다.

순지의 인물 전략은 다른 이들은 철저히 무시하고 주인공 우즈키의 일상을 해부하는 것. 첫 장면부터 끝 장면까지 그녀가 등장하지 않는 장면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다른 인물들은 마치 소품처럼 주인공의 주변에서 명멸할 뿐 누구도 살아있는 성격을 부여 받지 못한다. 영화는 그녀의 캐릭터를 묘사하는 수많은 장면과 감정의 끄트머리를 따라가는 영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영화 전체가 감성만화를 활동사진으로 틀어주는 것 같아 보인다.

이와이의 도구에 대한 집착과 그것이 빚은 몇몇 명장면은 이 영화의 세부를 채우는 요소가 된다. 내러티브 영화에서 장시간 들고 찍기 카메라는 흔하지 않지만 초반부를 거의 채우다시피 한 들고 찍기 카메라는 주인공의 낯설고 설레이는 감정을 퍽 자연스럽게 들려준다. 아울러 망원 렌즈가 만드는 얕은 심도와 하이라이트를 뭉개는 소프트 포커스 렌즈, 서점 창에서 입사하는 데이라이트 역광 등은 주인공 주변을 낭만의 빛으로 휘감는 도구적인 재료로 이용된다. 특히 자전거 도주 장면에서 점프 컷으로 빠르게 편집된 광각 화면은 정적인 흐름 중간에 묘한 파문을 불러 일으키는 장면으로 이와이 순지의 영상인적 기질이 드러나는 한 장면. 이와이의 그림에는 관객의 가슴을 쓰다듬는 좀 다른 의미의 무게가 느껴진다. 도입부에서 이삿짐 청년들이 스즈키의 자취집을 찾아가는 시퀀스가 한 예인데 일상 중에 갑자기 벌어진 사건을 우연히 망원렌즈로 압축한 듯한 이 장면은 플롯의 복선 기능도 하거니와 영상 자체로도 감각 이상의 명료한 이미지를 남긴다.

이 영화는 거의 모든 면에서 <러브레터>와 동류항을 이룬다. 기억에 집착하는 청순한 여인의 사랑 이야기도 그렇거니와 플롯을 감싸는 미스테리 구조, 화면을 전개하는 방식, 영화를 지배하는 감수성 또한 그렇다. 다른 것이라고는 이야기의 규모를 줄여 좀 더 간결한 구조와 소수의 인물을 취하여 작은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는 것. <러브레터> 그 이상을 원했다면 허전할 수도 있겠다. 힘주어 만들었다기 보다는 단편적 착상을 약간 늘여 놓은, 그래서 IMDB 리뷰의 결론은 "여고생을 위한 오후의 텔레비전 영화"이다.

김광철 (FILM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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