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지역주의 비웃는 미국선거

  • 입력 2000년 3월 6일 19시 29분


지금 미국에서는 올해 11월 치러질 대통령선거의 후보지명전인 예비선거가 한창이다. 미국 언론들은 여당인 민주당보다는 공화당의 지명전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다. 정권교체라는 기치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예비후보 존 매케인의 인생역정이 공개되면서 멜로드라마 효과를 내는 것 같다. 매케인에 비하면 조지 W 부시 후보는 순탄한 길을 걸었다. 열 네댓 개 주에서 지명전이 동시에 치러지는 오늘이 바로 판세가 어느 정도 잡히는 슈퍼화요일이다.

▷매케인은 태생지와는 전혀 관계없는 곳에서 정치인으로서 입지를 다졌다. 그는 파나마운하에서 태어났고 해군장교로 플로리다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지만 처가가 있는 애리조나 주에서 하원 및 상원의원으로 당선됐다. 43세때 재혼한 후 처음 가서 정착한 애리조나가 그의 정치적 고향인 셈이다.

▷만일 미국에 조금이라도 지역주의가 있었다면 매케인의 정치입문은 어려웠을 것이다. 1982년 그가 애리조나에서 처음 하원의원에 출마해 당선됐을 때 라이벌이 그 지역의 토착정객이었다는 점만 보아도 그렇다. 그는 뜨내기 이주자였다. 그의 장인과 함께 후원자 역할을 한 유력지 발행인 듀크 툴리조차 타관(他官)출신이었다. 툴리는 타지역 출신이지만 애리조나의 막강한 지역유력자 클럽 ‘피닉스 40’의 멤버였다. 그는 한국전과 베트남전에 참전했다며 무용담을 자랑하곤 했다. 그러면서 매케인 특집을 찍어냈다.

▷투표일 직전 피닉스시에는 이상한 말이 나돌았다. 툴리가 전혀 군 복무경력이 없다는 얘기였다. 매케인 진영은 발칵 뒤집혔다. 더 놀랍게도 툴리는 사실임을 시인했다. 그는 피닉스 생활을 훌훌 털고 어디론가 떠나갔다. 그의 무용담이 모두 거짓임이 드러난 것이다. 바로 지역에 뿌리를 두지 않은 타관 사람의 거짓 언행이 문제가 되는 상황이었다. 한국 같은 지역주의가 작용했다면 투표는 하나마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애리조나 유권자들은 매케인 후원자의 허풍을 비판하면서도 타관출신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지역주의에 얽매이지 않고 대통령 예비후보를 키워낸 애리조나 사람들은 자랑스러워 할 만하다.

<김재홍기자>nieman96@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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